[NBA Central] 뉴욕의 전설, 해리 갤러틴 별세
- NBA / Jason / 2015-10-09 10:54:13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The Horse' 해리 갤러틴이 지난 8일(이하 한국시간) 8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갤러틴은 뉴욕이 NBA로 들어오기 전부터 뉴욕에서 뛰었다. 지난 1948-1949 시즌부터 프로생활을 시작한 그는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에서 뛰었다. 이후 BAA와 NBA가 합병되면서 지난 1949-1950 시즌부터 NBA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갤러틴은 지난 1956-1957 시즌까지 무려 아홉 시즌을 뉴욕에서 보냈다. 뉴욕에서의 자신의 전성기를 보낸 그는 지난 1951년부터 1957년까지 내리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올스타전에만 일곱 차례 출장하는 당대의 스타선수 중 한 명이었다.
지난 1951년에는 생애 처음으로 파이널에 나섰다. 갤러틴이 속한 뉴욕은 동부지구 결승에서 시라큐스 네셔널스(현 필라델피아)를 꺾고 파이널에 올랐다. 하지만 로체스터 로열스(현 새크라멘토)에 4대 3으로 패해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듬해에도 갤러틴은 파이널에 나섰지만, 갤러틴은 다시금 무릎을 꿇어야 했다. 상대는 조지 마이칸이 이끄는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현 LA 레이커스)였다. 뉴욕은 이번에도 시리즈 최종전인 7차전을 치른 끝에 레이커스에 패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결국 갤러틴은 연이어 다가온 우승기회를 모두 놓쳤고, 이후 파이널에 오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지난 1953-1954 시즌에는 무려 15.2리바운드를 잡아내며 생애 첫 리바운드 부문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후 내리막을 피하지 못했고, 뉴욕은 그를 트레이드하기에 이른다.
뉴욕은 갤러틴과 함께 딕 애더 그리고 네이썬 클립턴을 포트웨인 피스턴스(현 디트로이트)에 보냈다. 그 대가로 포트웨인으로부터 멜 허친스와 찰리 타이라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갤러틴은 포트웨인에서 한 시즌을 보낸 뒤 유니폼을 벋었다.
선수생활을 은퇴한 그는 코치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은퇴한 이후에는 대학무대에서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지난 1962년에 지휘봉을 잡은 그는 세인트루이스 호크스(현 애틀랜타)에서 세 시즌을 보냈다. 세인트루이스에 부임하자마자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자신의 친정팀인 뉴욕에서도 감독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오랫동안 자리할 수 없었다. 지난 1964-1965 시즌이 개막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은 갤러틴 감독을 경질했다. 갤러틴 감독은 당시 21경기를 치러 6승 15패로 부진했고, 해고를 피하지 못했다.
이후 갤러틴은 대학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선수들을 잘 지도했다. 그는 열 곳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으며, 그중 다섯 곳이 선수들을 지도한 학교에서 선정된 곳이다. 하물며 갤러틴은 다소 늦은 지난 1991년에 NBA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1991년에는 네이트 아치발드, 데이브 코웬스를 비롯해 바비 나이트 감독까지 굵직굵직한 족적을 쌓은 선수 및 감독이 명예의 전당에 입회한 해다. 갤러틴도 이 때 이들과 함께 호명되면서 자신이 NBA에서 쌓은 모든 것들을 인정 받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갤러틴은 뉴욕이 NBA로 들어오기 전부터 뉴욕에서 뛰었다. 지난 1948-1949 시즌부터 프로생활을 시작한 그는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에서 뛰었다. 이후 BAA와 NBA가 합병되면서 지난 1949-1950 시즌부터 NBA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갤러틴은 지난 1956-1957 시즌까지 무려 아홉 시즌을 뉴욕에서 보냈다. 뉴욕에서의 자신의 전성기를 보낸 그는 지난 1951년부터 1957년까지 내리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올스타전에만 일곱 차례 출장하는 당대의 스타선수 중 한 명이었다.
지난 1951년에는 생애 처음으로 파이널에 나섰다. 갤러틴이 속한 뉴욕은 동부지구 결승에서 시라큐스 네셔널스(현 필라델피아)를 꺾고 파이널에 올랐다. 하지만 로체스터 로열스(현 새크라멘토)에 4대 3으로 패해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듬해에도 갤러틴은 파이널에 나섰지만, 갤러틴은 다시금 무릎을 꿇어야 했다. 상대는 조지 마이칸이 이끄는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현 LA 레이커스)였다. 뉴욕은 이번에도 시리즈 최종전인 7차전을 치른 끝에 레이커스에 패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결국 갤러틴은 연이어 다가온 우승기회를 모두 놓쳤고, 이후 파이널에 오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지난 1953-1954 시즌에는 무려 15.2리바운드를 잡아내며 생애 첫 리바운드 부문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후 내리막을 피하지 못했고, 뉴욕은 그를 트레이드하기에 이른다.
뉴욕은 갤러틴과 함께 딕 애더 그리고 네이썬 클립턴을 포트웨인 피스턴스(현 디트로이트)에 보냈다. 그 대가로 포트웨인으로부터 멜 허친스와 찰리 타이라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갤러틴은 포트웨인에서 한 시즌을 보낸 뒤 유니폼을 벋었다.
선수생활을 은퇴한 그는 코치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은퇴한 이후에는 대학무대에서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지난 1962년에 지휘봉을 잡은 그는 세인트루이스 호크스(현 애틀랜타)에서 세 시즌을 보냈다. 세인트루이스에 부임하자마자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자신의 친정팀인 뉴욕에서도 감독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오랫동안 자리할 수 없었다. 지난 1964-1965 시즌이 개막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은 갤러틴 감독을 경질했다. 갤러틴 감독은 당시 21경기를 치러 6승 15패로 부진했고, 해고를 피하지 못했다.
이후 갤러틴은 대학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선수들을 잘 지도했다. 그는 열 곳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으며, 그중 다섯 곳이 선수들을 지도한 학교에서 선정된 곳이다. 하물며 갤러틴은 다소 늦은 지난 1991년에 NBA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1991년에는 네이트 아치발드, 데이브 코웬스를 비롯해 바비 나이트 감독까지 굵직굵직한 족적을 쌓은 선수 및 감독이 명예의 전당에 입회한 해다. 갤러틴도 이 때 이들과 함께 호명되면서 자신이 NBA에서 쌓은 모든 것들을 인정 받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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