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부상으로 은퇴했던 옥범준, “농구를 너무 사랑해요”
- BAKO INSIDE / 손동환 기자 / 2022-07-17 10:49:00

농구공 하나 때문에,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다. 너무 많은 상처는 이른 은퇴로 이어졌다. 너무 빨리 농구공을 놓았던 남자는 농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농구를 버리지 못했다. 아니, 농구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그 마음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길 원했다. OBJ TRAINING에서 스킬 트레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옥범준의 이야기다.

옥범준의 신체 조건이나 운동 능력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기량만큼은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특히, 포인트가드로서의 역량이 그랬다. 드리블과 슈팅, 패스 등 기본기가 탄탄했고,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경기 운영 역시 돋보였다.
고교 NO.1 가드로 꼽힌 옥범준은 성균관대로 진학했다. 대학 무대에서도 여유와 노련함, 안정감을 동시에 보여줬다. 2000년대 초반 KBL에 열풍을 일으킨 김승현도 “옥범준은 대형 가드가 될 수 있는 재목”이라며 옥범준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옥범준은 대한민국을 이끌 차세대 포인트가드로 지목됐다. 그러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악재가 대학교 때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차세대 포인트가드’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를 전성기라고 생각합니다. 부상도 많지 않았고. 모든 면에서 좋았거든요.
하지만 대학교 입학 후 부상을 많이 당했습니다. 2학년 때 MBC배 우승을 차지했지만, 결승전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됐습니다. 발뒷꿈치 뼈도 골절됐고요. 경기 중간에는 몰랐지만, 끝나고 나니 아프더라고요.(웃음)
그렇게 몸이 1~2군데씩 고장났습니다. 다치기만 했고, 몸을 끌어올리지 못했습니다. 감독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했어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고, 박성근 감독님한테 “그만두겠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부상이 많았지만, 2003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여수 코리아텐더(현 수원 KT)에 입단했습니다.
제가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박성근 감독님께서 “너가 3학년까지만 마친다면, 프로에 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그 때부터 대학 재학 중인 선수들도 프로에 도전할 수 있었거든요.
감독님의 말씀을 듣고, 1년 동안 죽어라 운동만 했습니다. 개인 기록도 나쁘지 않았지만, 팀 성적도 괜찮았습니다. 프로 감독님들께서 그런 점을 좋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2순위라는 영광을 누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여수 코리아텐더는 매각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저는 그저 ‘2순위’로 프로에 가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저를 지목해주신 팀에서 최대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물론, 팀이 어려운 사정에 놓였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런 점은 저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코리아텐더가 결국 KTF로 매각됐고, ‘선수 옥범준’은 데뷔 첫 시즌(2003~2004)에 53경기 출전에 평균 13분 20초 동안 코트를 밟았습니다. 경기당 평균 기록은 3.1점 2.2어시스트 1.4리바운드였고요.
몸을 잘 만들었고, 훈련도 열심히 했습니다. 노르웨이로 전지훈련을 갈 때만 해도, 몸이 좋았어요. 현주엽 선배님과의 호흡도 좋았고요.
그런데 제가 시즌 개막을 한 달 앞두고,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한강에서 길거리 농구를 하다가, 발목이 완전히 돌아갔어요. 인대가 다 끊어질 정도였어요.
시즌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았고, 복귀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치료를 어느 정도 했다고는 하지만,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시즌을 소화했죠. 절뚝거리면서도 뛰었어요. 뛰지 않으면, 제 가치가 깎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만 제 기량이 나오는 건 너무 어려웠습니다. 안 나오는 게 당연했어요. 그래서 출전 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돌이켜보면, 제가 너무 미숙했던 것 같아요. (100%를 만들지 않고 뛴 게) 실수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선수 옥범준’의 데뷔 첫 시즌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두 번째 시즌에 더욱 발전된 경기력을 기대했다. 그러나 데뷔 첫 시즌이 옥범준에게 가장 좋은 기억이었다. 그 때의 경기력이 옥범준의 커리어 하이였기 때문.
시간이 흐를수록, ‘부상’이라는 악재가 옥범준을 더욱 집요하게 괴롭혔다. 옥범준은 어떻게든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몸도 마음도 더욱 지쳐갔다. 부상에 지친 옥범준은 2011~2012 시즌을 앞두고 은퇴했다. ‘차세대 포인트가드’의 선수 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선수 생활 내내 기대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부상’이라는 악재가 ‘선수 옥범준’을 따라다녔는데요.
맞습니다. ‘부상’은 저를 계속 따라다니는 악재였습니다. 발목과 무릎, 허리와 목, 어깨와 손가락 등 너무 많이 다쳤어요. 한 시즌도 건강하게 뛴 적이 없을 정도로요.
하지만 그건 핑계이자 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에서는 몸 관리를 하는 것도 선수의 능력이고, 프로 선수라면 결과로 증명해야 하거든요. 결국 제 관리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2011~2012 시즌을 앞두고 은퇴했습니다.
데뷔 시즌을 소화한 후, 상무로 입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상무에서도 다쳤어요. 집이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고요. 죽고 싶을 만큼 어려웠지만,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힘든 시기를 어느 정도 이겨냈죠.
그러다가 안양 KT&G(현 안양 KGC인삼공사)로 트레이드됐습니다. 그렇지만 부상이 반복됐습니다. 2009~2010 시즌 이후 FA(자유계약) 자격으로 서울 SK에 갔지만, SK 입단 후 3일 만에 손가락 골절을 입었습니다. 또, 수술을 했죠.(웃음)
손가락 수술 이후, 해당 부위를 제외한 모든 부위를 단련했습니다. 하지만 오버 트레이닝을 했던 것 같아요. 손가락 수술 후 3개월 만에 복귀했지만, 허리가 나갔어요. 몇 개월을 걷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어요.
2군에서 몸을 계속 만들었지만, 계속 다쳤습니다. 하지만 감독대행이 되신 문경은 감독님께서 “1년 더 뛰어볼래?”라고 물어보셨고, 저는 다시 해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2~3일 만에 또 허리를 다쳤어요. 이 몸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은퇴를 결심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제 자신이 너무 수치스럽더라고요.

충북 제천은 약 13만 명의 소도시다. 청주시와 충주시 다음으로 충청북도에서는 큰 도시다. 강원도와 경상북도를 잇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고 있던 독자들은 너무나 뜬금없을 것이다. 옥범준을 이야기하다가, 충북 제천을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유가 있다. 옥범준이 제2의 인생을 일궈낸 곳이 ‘충북 제천’이기 때문. ‘충북 제천’은 막막했던 옥범준에게 단비 같은 곳이었다. 옥범준을 새롭게 만든 곳이기도 했다.
은퇴 직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은퇴 후 2~3년 정도는 프로 경기를 보지도 않았습니다. 도피하다시피, 처가인 제천으로 이사했죠. 굉장히 막막했어요. 아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냥 아무 것도 없었거든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가 났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다가 돌부리를 만났는데, 브레이크가 고장이 났더라고요. 자전거가 결국 앞으로 쓰러졌고, 아스팔트에 제 얼굴부터 떨어졌어요.
그 부상으로 치아 3개를 잃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인중을 뚫고 지나갔어요. 목 부상도 생겼어요. 은퇴한 것도 미치겠는데, 얼굴까지 다치니 죽겠더라고요. 그 자전거 사고 때문에, 대인기피증이 더 심해졌던 것 같아요.
큰 부상을 당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털어내신 것 같아요. 기사를 찾아보니, 부상 직후에 많은 일들을 하셨더라고요.
몸이 어느 정도 낫고 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근처에 있는 야외 코트에서 농구를 했죠. 밖에서 슛을 던지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저를 알아보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저 옥범준 아니예요”라고 했어요.(웃음)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싫어서,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제천에 왔다는 소식이 쫙 퍼졌더라고요.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가 운동하는 코트를 찾아왔고, 5~60명의 인원이 같은 코트에서 운동했습니다. 그 인원을 토대로, 아마추어 동호회가 결성됐죠.
일반인들인데, 선수들처럼 1주일에 3번씩 훈련했어요. 저도 선수들 가르치듯이 동호회 분들을 가르쳤고요.(웃음) 저 역시 감독 겸 선수로 그 분들과 함께 대회에 나갔습니다. 운 좋게도 전국대회 우승까지 차지했고요.
그런 상황들이 소문으로 퍼졌고, 제천시체육회 사무국장님께서 저한테 입사를 제의하셨습니다. 저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제천시체육회로 입사했습니다. 그 곳에서 사업계획서 작성 등 업무에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을 배웠습니다. 공설운동장 코트에서 혼자 3일 동안 코트를 그린 적도 있었고요.(웃음) (자신이 그린 코트가 아직도 그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제천시체육회 이름으로 유소년 농구 교실을 운영했습니다. 방과 후 교실에서 농구 강사도 했습니다. 결국 제천시체육회를 그만두고, 농구 교실과 학원 스포츠 강사에 전념했습니다. 농구 교실을 직접 운영하기 위해, 사업자등록증도 만들었고요.
그러다 보니, 제천시에 농구협회를 만들어보겠다는 꿈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5개 이상의 팀이 시에 있어야 한다. 시에 있는 동호인은 300명 이상이어야 한다. 임원진도 갖춰져야 한다’ 등 조건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지닌 인맥을 최대한 모았고, 결국 제천시농구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가 2014년이었을 거예요.
지금은 스킬 트레이너를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농구 교실을 오랜 기간 운영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마침 그 때 한 엘리트 선수가 울산에서 제천까지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엘리트 선수를 가르쳐본 경험이 없어요”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수가 “그래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결국 그 선수를 가르쳤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엘리트 선수로서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제가 지닌 노하우와 경험들을 더 알려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스킬 트레이닝’을 결심했던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마음을 먹은 건 2015년 정도였어요. 먼저 스킬 트레이닝 관련 영상들을 찾아봤고, 미국에서 조던 라우리나 제이슨 라이트 등 유명 트레이너들에게 연수를 받았습니다. 너무 만족스러웠어요. 저한테는 새로운 세계였어요. ‘선수 시절 때 이런 게 있으면 도움이 됐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2016년인가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스킬 트레이닝을 시작했습니다. 충북 제천과 경북 영주에 스킬 트레이닝 지점을 오픈했죠. 엘리트 농구부가 없는 지역이었지만, 근처에 있는 강원도 원주(제천 인근)나 대구(영주 인근)에서 많이 찾아왔어요.
그러다 보니, 욕심이 커졌어요. 더 큰 도시로 가고 싶었어요. 제천 지점과 영주 지점을 없애고, 전남 광주와 대구에 새로운 지점을 오픈했습니다. 하지만 주변 상황과 코로나19 때문에 문을 닫아야 했고, 경기도 오산과 부천에 다시 지점을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곳에서 스킬 트레이닝을 하고 있어요.
(옥범준은 현재 스킬 트레이닝 관련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명은 ‘닥터 오비제이 DR OBJ'다. 의사 가운을 입은 옥범준이 기술 치료를 받고 싶어하는 일반인들을 치료해주는 컨셉이다)

옥범준은 선수 시절 너무 많이 다쳤다. 은퇴 후 농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지금은 누구보다 농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농구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던 옥범준이 왜 농구에 목을 매고 있는 걸까? 기자는 궁금증이 문득 생겼다. 문득 생긴 궁금증을 옥범준에게 질문했다.
옥범준의 대답은 간단했다.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크다”였다. 그리고 옥범준은 자신의 대답을 발전시켰다. “농구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농구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제천에 농구협회와 동호회도 만들었고, 농구 전용 체육관도 만들고 있습니다. 제천이 주는 의미가 클 것 같은데요.
제천은 저한테 제2의 고향이자 집입니다. 지금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서 1주일에 2일만 제천에 있지만, 제천에 있는 게 마음이 더 편한 것 같아요. 잠도 잘 오고요.(웃음)
제가 사실 한 번 뭔가 시작하면 끝을 보려고 해요. 제가 해당 분야의 처음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크고요. 제천 농구 인프라도 마찬가지였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싶은 마음이 컸고, 제천 농구 인프라를 확대하고 싶었어요. 제가 오기 전만 해도, 제천에는 농구와 관련된 게 아무 것도 없었거든요.
물론, 모든 걸 제 힘으로 해낸 건 아닙니다. 저를 도와주신 분들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제 시간을 많이 투자한 건 사실입니다. 비록 돈은 많이 못 벌었지만(웃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끝을 보고 싶었어요.
제천 외에도 농구 인프라를 만들고 싶은 소도시가 있을까요?
너무 많아요. 그렇지만 한 소도시의 농구 인프라를 만들려면,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희생해야 합니다. 저 역시 그것 때문에 아내랑 많이 싸웠어요. 가족한테 신경 쓸 시간에, 돈이 안 되는 일을 했으니까요.(웃음)
그래도 농구판을 크게 보려고 했습니다. 농구 인프라가 잘 형성되면, 농구인들이 더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농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더 많아져야, 농구 관련 사업이 더 잘될 거라고는 생각도 들었고요.
무엇보다 농구를 너무 사랑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농구를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분들이 농구를 더 좋아하신다면, 농구 인프라가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옥범준’의 근황을 궁금해하시는 분들한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최근에 “‘선수 옥범준’ 때문에, 학창시절을 농구로 빛냈던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감사했습니다. 팬들의 그런 응원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지금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은퇴를 했지만, 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저를 기억해주시는 많은 분한테, 제가 살고 있는 ‘제2의 농구 인생’을 많이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 김우석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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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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