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Inside] 선수생활을 마감한 쉐인 베티에, 그의 뜨거웠던 13년을 돌아보며

NBA / Jason / 2014-07-07 07:07:00
세인 베티에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견실함과 꾸준함의 대명사. 쉐인 베티에가 13시즌동안 정들었던 NBA 코트를 떠난다.

베티에는 파이널이 끝난 직후인 지난 17일(이하 한국시간) 은퇴할 것이라 밝혔다. 베티에는 다가오는 시즌부터 스포츠 전문매체인 ESPN에서 대학농구 애널리스트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예정이다.

미국나이로 35세인 베티에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선수였다. 베티에는 지난 2001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6순위로 지명됐다. 베티에는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전신인 벤쿠버 그리즐리스에서 NBA선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베티에는 단 한 차례도 올스타에 선정되지도 않았고, 여느 슈퍼스타들처럼 많은 이목을 집중시킨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늘 본연의 자리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쏠쏠한 활약을 펼친 선수였다.

NBA에 오기 전 시즌, 베티에는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서의 시즌을 치렀다. 베티에는 팀을 파이널포에 올린 것도 모자라 듀크 블루데블스를 전미 챔피언으로 견인했다. 그는 AP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가 하면, 토너먼트 MOP(Most Outstanding Player)도 수상했다. 이밖에도 존 우든 어워드와 네이스미스 어워드까지 석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베티에는 그리즐리스가 창단 첫 플레이오프에 오르는데 있어 가교역할을 했다. 이후 휴스턴 로케츠에서는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와 야오 밍을 보좌하며 휴스턴이 우승후보로 발돋움하는데 일조했다. 이어 선수생활 막바지에 합류한 마이애미 히트에서는 키식스맨으로 거듭나며 팀의 '2연패'를 돕는 등 남부럽지 않은 선수생활을 보냈다.

지난 2006년에는 나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서울을 들리기도 했다. 당시 미 대표팀은 일본에서 열린 월드챔피언십(현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기 전 한국을 경유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그 중에서도 베티에는 서울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에 들러 스님과 녹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과도 아주 작은이 있는 베티에. 조금은 이른 은퇴인 것 같아 아쉽지만, 몸상태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던 베티에는 은퇴를 선택했다. 이에 베티에의 길고 길었던 NBA 시절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화려했던 대학시절을 뒤로 하고' in 멤피스 그리즐리스

베티에가 합류한 멤피스는 당시 약체 중의 약체였다. 멤피스는 베티에가 합류했음에도 8연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8경기 평균 두 자리 수 득점 차로 패하는 등 좀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베티에는 데뷔 두 번째 경기에서 홀로 22점을 터트리며 NBA에서도 통할 수 있는 선수임을 입증했다.

이후 베티에는 꾸준히 두 자리 수 득점을 올리며 차차 프로생활을 적응을 마쳤다. 베티에는 첫 시즌에 78경기 모두 주전으로 나서며 평균 14.4점 5.4리바운드 2.8어시스트 1.6스틸 1블락을 올리면서 대학무대에 이어 프로에 연착륙했다. 당시 멤피스는 23승 59패로 초라하게 시즌을 마쳤지만, 미래를 기대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2001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파우 가솔을 지명하면서 본격적인 채비를 마쳤다.

가솔이 합류하면서 베티에는 주전과 벤치를 오르내렸다. 가솔을 비롯하여 드류 구든과 스트로마일 스위프트가 주전으로 나선 탓이 컸다. 컨디션 조절이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베티에는 멤피스의 주축다운 모습을 내비쳤다. 전반적인 기록은 떨어졌지만, 효율만큼은 오히려 더 좋아졌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베티에는 가솔과 함께 2003-2004 시즌부터 팀을 플레이오프로 견인했다. 멤피스는 지난 2002-2003 시즌 막판부터 부임한 휴비 브라운 감독이 팀을 정비하면서 플레이오프권 팀으로 부상했다. 당시 브라운 감독은 멤피스의 두터운 선수층을 십분 활용했다. 각 포지션별로 플래툰시스템을 통해 여러 선수들을 고루 기용했다.

멤피스는 브라운 감독의 지도 아래 무럭무럭 성장하는 듯 보였다. 선수층도 두터워 당일 컨디션에 따라 잘 하는 선수가 나오면, 멤피스로는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하지만 멤피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그 이상의 성과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멤피스는 세 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정작 1승도 올리지 못했다. 멤피스는 세 시즌 내리 12연패를 기록하며 쓸쓸히 짐을 싸야했다.

이 때 베티에는 정규시즌 때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베티에는 이 때 나선 플레이오프 12경기에서 평균 6점 5.2리바운드에 그쳤다. 3점슛 성공률도 30%를 넘기지 못했다. 베티에가 기록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의 활약을 하는 선수라지만, 팀에 큰 힘이 되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결국 멤피스는 감독 교체의 홍역을 치른 끝에 베티에를 트레이드하기에 이른다. 준척급 선수들이 여럿 쏟아진 2006 드래프트 이후에 트레이드됐다. 멤피스는 휴스턴이 지명한 루디 게이(현 새크라멘토)와 2005년 여름 휴스턴으로 떠난 스위프트를 받는 대가로 베티에를 휴스턴으로 보냈다.

하지만 베티에와 멤피스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베티에는 2010-2011 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다시 친정팀 유니폼을 입게 된다. 휴스턴이 멤피스로부터 드마레 캐럴(현 애틀랜타)과 하심 타빗(현 오클라호마시티)를 받는 조건으로 베티에와 이스마엘 스미스(현 피닉스)를 주고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새로 합류한 멤피스는 베티에가 20대를 보낸 멤피스와는 전혀 달랐다. 멤피스는 라이오넬 홀린스 감독 부임 이후 꾸준히 발전했다. 마이크 컨리와 마크 가솔이 꾸준히 성장했고, 멤피스 유니폼을 입은 잭 랜돌프는 이전까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주득점원이자 팀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에 홀린스 감독이 추구해 온 수비가 여실히 녹아들면서 멤피스는 서부 컨퍼런스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해 있었다. 그리고 멤피스는 고생 끝에 당해 시즌 8번시드를 거머쥐었다. 멤피스는 무려 다섯 시즌만에 플레이오프에 오르는 감격을 누렸다. 베티에도 이 기쁨을 함께 만끽했다.

어느 덧 베테랑이 된 베티에는 멤피스에서 더 이상 주전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나서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던 멤피스에서 그는 '리더'로서 어린 선수들을 잘 이끌었다. 베티에는 멤피스에서 실패했던 경험과 휴스턴에서의 경험을 통해 젊은 선수들에게 새로운 동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멤피스는 마누 지노빌리를 중심으로 공격지향적인 농구를 펼친 탑시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침몰시키는 '대이변'을 만들어냈다. 멤피스가 샌안토니오에 시리즈 스코어 4대 1로 승리를 거둔 것.멤피스는 샌안토니오에 정규시즌 전적에서도 앞서 있었을 정도로 샌안토니오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플레이오프에서는 그 이면이 여실히 드러나며 '샌안토니오 침몰'을 일궈냈다.

운도 따랐다. 에이스였던 지노빌리는 당시 팔꿈치 부상으로 시리즈 초반을 결장했다. 시리즈 중반에는 붕대를 부여감고 경기를 뛰었지만, 정상이 아닌 컨디션으로 부상 이전의 경쾌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흡사 슬램덩크의 북산이 산왕공고를 무너트린 느낌이었다. 아쉽게도 서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는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에 무릎을 꿇었지만, 어찌 보면(?) 샌안토니오가 떨어졌기에 댈러스가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오클라호마시티를 만나게 된 건지도 모른다. 멤피스는 그야말로 2011 플레이오프에서 판도를 뒤바꿨다.

베티에의 역할은 '멘토' 그 이상이었다. 어린 선수들을 잘 다독이며 경기의 흐름을 주도했고, 때로는 상대의 빠른 가드들을 직접 수비하기도 하는 등 베테랑으로서의 존재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멤피스로서도 데드라인을 앞두고 베티에를 다시 데려온 것은 '신의 한 수'나 다름없었다.

'우승에 도전했던 시절' in 휴스턴 로케츠

베티에는 트레이드에 덤덤했다. 베티에는 휴스턴에서도 그만의 강력한 무기인 '꾸준함'을 내세워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거듭났다. 베티에가 합류하기 전 휴스턴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맥그레이디와 야오 밍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다.

그 와중에 베티에는 전 시즌에 이어 한 번 더 평균 10.1점을 기록했다. 베티에는 이 때 당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82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장하면서 입지를 굳건히했다. 베티에의 역할상 주전과 비주전을 가리진 않았지만, 맥그레이디와 야오 밍이 많은 시간동안 코트에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베티에는 묵묵히 역할을 다했다.

공교롭게도 휴스턴은 베티에의 합류와 함께 다시금 플레이오프 무대에 명함을 내밀었다. 하지만 베티에도 휴스턴에서 좀체 1라운드를 뚫지 못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맥그레이디와 야오 밍의 부상이 늘 따라다녔기 때문. 맥그레이디가 있으면 야오 밍이 없었고, 반대로 맥그레이디가 건재하면 야오 밍이 양복을 입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2007-2008 시즌에는 엄청난 기록을 만들어내는데 큰 힘을 보탰다. 당시 휴스턴은 야오 밍이 또 한 번 시즌아웃됐다. 잦은 국제대회 출전 탓에 쉬질 못한 탓에 피로골절이 온 것. 휴스턴의 시즌이 또 다시 부상으로 얼룩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맥그레이디를 중심으로 똘똘뭉친 선수들은 시즌 중반 무려 22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마이애미의 기록에 이어 3위로 밀렸지만, 당시 2위의 기록이었던 휴스턴의 연승은 대단했다. 원래 멤버가 탄탄한 탓도 있었지만, 베테랑 센터인 디켐베 무톰보가 수비에서 만큼은 야오 밍의 공백을 최소화했고, 베티에는 여전히 포지션을 넘나들면서 맥그레이디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여전히 1라운드를 넘어서지 못했다. 맥그레이디 혼자서는 무리였을까? 휴스턴은 1라운드에서 데런 윌리엄스와 카를로스 부저가 이끄는 유타 재즈에 맞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지만, 아쉽게 승리는 쟁취하지 못했다. 맥그레이디는 물론이고 베티에의 1라운드 징크스가 다시 한 번 뇌리를 울렸다.

2008년 여름, 휴스턴은 론 아테스트(현 메타 월드피스)를 영입하면서 또 한 번 더 우승후보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맥그레이디와 야오 밍은 물론이고 애런 브룩스, 레이퍼 앨스턴, 브렌트 배리가 백코트를 책임졌고, 베티에, 아테스트, 루이스 스콜라, 칼 랜드리가 프런트 코트를 맡으면서 휴스턴의 선수층은 여느 때보다 두터웠다.

그러나 또 실패였다. 맥그레이디는 22연승 이후 점차 부상으로 결장하는 빈도가 높았다. 야오 밍 홀로 공격의 활로를 뚫어 나가기에는 서부에서 플레이오프에 오른 팀들의 벽이 너무나도 높았다. 휴스턴은 1라운드에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제압하고 2라운드에 올랐다. 야오 밍과 베티에의 '1라운드 징크스'가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다음 상대는 우승을 노리고 있는 LA 레이커스였다. 레이커스는 멤피스로부터 가솔을 데려오면서 서부의 유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라 있었다. 베티에는 생애 첫 2라운드에서 옛 동료인 가솔을 상대해야 했다. 게다가 레이커스의 에이스는 MVP 시즌을 보낸 코비 브라이언트. 휴스턴에서는 브라이언트를 아테스트와 베티에가 줄곧 따라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휴스턴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연이어 실패했다. 제 아무리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릭 애들먼 감독도 전력상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휴스턴은 줄곧 5할 승률을 넘었지만, 서부에서 플레이오프를 뚫어내기엔 5할 승률이 턱없이 모자랐다. 무엇보다 맥그레이디와 야오 밍의 부상결장빈도가 많았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베티에는 팀이 어수선한 와중에도 묵묵히 제 몫을 해냈다. 어느덧 30줄을 넘어서면서부터 베티에의 기록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2010-2011 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베티에는 멤피스 유니폼을 다시 입었고, 이후 새로운 팀에 합류한다.

'챔피언십 획득' in 마이애미 히트

베티에의 행선지는 '남쪽바다'였다. 베티에는 '미니 MLE'를 통해 마이애미 유니폼을 입었다. 베티에가 합류하기 전 마이애미는 BIG3를 구성하고도 우승에 실패했다. 심지어 마이크 밀러와 유도니스 해슬럼까지 앉히고도 말이다. 이 때 베티에가 마이애미의 손을 잡았다. 더 높은 연봉을 수령할 수 있는 조건이었지만, 베티에는 우승을 위해 마이애미로의 합류를 주저하지 않았다.

베티에의 마이애미 입단은 대성공이었다. 이미 결과가 말해주는 것도 있지만, 베티에는 커리어 내내 이어온 내구성을 바탕으로 정규시즌 때부터 BIG3의 뒤를 잘 받쳤다. 마이애미에서 보낸 세 시즌 평균 기록인 5.1점에 불과하지만, 베티에는 팀이 필요할 때 어김없이 양 코터에서 3점슛을 터트리는가 하면 상대 주득점원을 막기도 했다. 공격자 파울을 유도하는 센스는 여전했다.

베티에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다름 아닌 플레이오프에서였다. 특히 2012 플레이오프에서 베티에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만난 보스턴 셀틱스와의 7차전에서 3점슛 4개를 터트리면서 마이애미가 두 시즌 연속 동부 컨퍼런스 챔피언에 오르는데 힘을 보탰다.

파이널에서의 공헌도는 가히 최상이었다. 베티에는 오클라호마시티와 맞선 시리즈에서 5경기 평균 11.6점 3.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득점은 정규시즌 대비 두 배에 가까웠다. 단연 압권은 3점슛이었다. 베티에는 파이널에서 경기당 3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다. 성공률은 무려 57.7%였을 정도로 베티에의 외곽슛 감각은 실로 엄청났다.

이듬해에도 베티에의 역량은 빛이 났다. 베티에는 마이애미가 정규시즌에서 27연승을 내달렸다. 베티에는 휴스턴에서 22연승을 올린 팀에서 뛴 데 이어 마이애미에서 휴스턴의 기록을 밀어내는 데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베티에는 이 기간에도 시즌 기록보다 상회한 경기당 7.8점을 올렸는가 하면 3점슛 성공률도 49.6%라는 높은 성공률을 뽐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선 더 이상 예전의 베티에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마이애미의 스몰라인업에 다소 한계에 부딪히는 면이 크게 작용했다. 베티에도 좀체 효과적인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베티에의 진가는 가장 필요할 때 드러났다.

베티에는 샌안토니오와의 파이널에서 팀이 3대 2로 뒤진 상황에서 또 한 번의 '3점슛 퍼레이드'를 선보였다. 베티에는 팀이 코너에 몰린 6차전에서 3점슛 4개를 시도했다. 이중 3개가 림을 갈랐다. 무엇보다 팀이 추격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3점슛이었기에 값어치는 더욱 컸다. 이어진 7차전. 베티에는 전반부터 불꽃과 같은 3점슛을 폭발시켰다. 결국 베티에는 이날 무려 6개의 3점슛을 성공시키며 팀이 시리즈를 뒤집고 '2연패'를 차지하는데 가히 최고의 컨디션으로 화답했다. 베티에의 이날 3점슛 성공률은 75%였다.

마이애미가 2연패를 차지하는 데는 이처럼 알토란같은 활약을 더한 베티에의 역할이 컸다. 베티에가 정규시즌에 버텼다면, 중요할 때는 마이크 밀러(현 멤피스)의 3점슛이 결정적이었다. 그렇다고 베티에가 마지막 순간에 빛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베티에의 역할이 컸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이애미는 이번 파이널에서 '3점슛의 부재'를 절감해야만 했다. 밀러는 사면방출되면서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베티에는 더 이상 예년과 같이 많은 시간을 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마이애미는 르브론 제임스에게만 의존했고, 이는 파이널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베티에는 충분히 성공적인 선수였다. 대학시절은 물론이고 프로에 와서도 우승트로피에 입맞춤을 했다. 보통 대학최고의 선수들이 NBA에서 미끄러지는 경우도 적잖은 데 베티에만큼은 대학은 물론 프로에서까지 부족하지 않은 커리어를 보냈다.

이는 베티에의 견실함과 꾸준함이 나은 산물이 아닐까? 늘 팀의 사정에 따라 주전과 벤치를 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역할에 따라 벤치에서 나서는 빈도가 늘었다. 그럼에도 불평과 불만은 없었다. 베티에는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본연의 역할을 수행했고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베티에의 우승트로피는 그에 따른 보상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NBA에서 베티에는 명백히 주연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인생에서 만큼은 가장 멋진 주연이었으며, 가장 빛났던 존재였다.

N0.31 쉐인 베티에. 그의 커리어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사진 = NBA Mediacentral, ESPN Capture

[ⓒ 바스켓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Jason Jason

기자의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