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길의 밥하다 농구(2)] NBA의 수요/공급법칙

NBA / 연길 최 / 2014-03-14 09:20:25
kevin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검색해 봅시다. 그러면 ‘수요 곡선과 공급 곡선이 일치하는 시장 균형의 상태에서 가격과 거래량이 결정된다는 원리’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기본적인 경제 개념 중 하나죠. 그리고 이 원칙은 프로 스포츠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NBA에서도 그렇죠.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NBA 역사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끼워 맞춰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수유동에 사는 가정주부 최연길입니다. NBA는 단일 리그로는 전 세계 최고 인기 리그입니다.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가 아니냐, NFL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EPL은 전 세계 스포츠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 시장에서 외면을 받고 NFL은 미국 외에서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NBA가 1990년대 글로벌 정책으로 세계적인 리그로 성장한 데는 끊임없이 슈퍼스타들을 배출하고 해외파 스타들이 탄생하며 그 나라를 시장으로 흡수하는 등 수준 높은 경기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득점력이 떨어지면 다양한 정책과 규정 도입으로 득점력 향상을 유도하는 등 NBA의 노고는 결실로 이어졌죠.

- 시행착오를 겪었던 초창기

NBA는 1946년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라는 이름으로 출범했습니다. 출범 당시는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리그였죠. 당시는 NBL(National Basketball League)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로체스터 로열스,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포트웨인 졸너 피스톤스 등 훗날 NBA에 합류하는 명문구단들은 NBL 소속이었습니다. 처음 BAA에는 11개 팀이 있었습니다. 캐나다 소속인 토론토 허스키스도 있었죠. 하지만 대부분 구단들이 단명했습니다.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팀은 보스턴 셀틱스와 뉴욕 닉스, 그리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당시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단 세 팀뿐이죠.

경기력도 처음에는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즌 중에도 선수들이 해고되거나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경우도 허다했죠. 그럼에도 NBA가 빠르게 정착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NBL보다 더 큰 시장인 대도시를 확보했고, 구단주의 대부분이 아이스하키 구단주로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또한 최고의 흥행카드인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를 끌어왔다는 것입니다. 미니애폴리스에는 당시 최고 슈퍼스타인 조지 마이칸이 버티고 있었죠. 미니애폴리스는 1948-49 시즌부터 6시즌 동안 5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NBA 최초의 왕조가 되었습니다.

또한 초창기 동부 해안 쪽에 구단이 몰려 있었지만 1948년 NBL의 4개 팀포트웨인 피스톤스, 인디애나폴리스 제츠, 로체스터 로열스, 미니애폴리스 등이 가세하며 미국 중부로 영역을 넓혔습니다. 1949-50 시즌에는 BAA가 NBL을 흡수합병하면서 NBA로 이름을 바꿨고 소속팀도 17개로 늘었죠.

팀이 늘어난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미니애폴리스의 시대였고 경기력 차이는 심했죠. 팀이 늘어나며 상위팀과 하위팀과 격차는 더 심해졌습니다. 특히 가장 큰 시장이었던 뉴욕 닉스, 보스턴 셀틱스가 하위권에 머물며 불만이 커졌죠. 결국 뉴욕과 보스턴은 새로운 선수들에게 눈을 돌렸고 1950년 인종의 벽이 허물어지게 됩니다. 만약 뉴욕과 보스턴이 반대했다면 인종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은 더욱 늦었겠죠.

1950년 NBA 드래프트에서 보스턴은 듀케인 대학 출신 척 쿠퍼를 지명했습니다. 또한 뉴욕은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출신 센터인 냇 ‘스위트워터’ 클리프튼과 계약했죠. 이 사건이 수요에 따라 공급이 늘어나는 첫 번째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급이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흑인 선수들의 능력이 뛰어났지만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 때문이죠. 흑인 선수들은 수비나 궂은 일 밖에 할 수 없었고 또한 암묵적인 출장 제한과 흑인 선수 쿼터제까지 있었습니다. 결국 NBA는 팀의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 강력한 라이벌 리그 ABA의 등장

1967년에는 NBA에 가장 큰 위기이자 또한 기회가 생깁니다. 바로 NBA의 라이벌 ABA(American Basketball Assocation)가 창설한 것이죠. ABA는 그동안 정체된 NBA와는 다르게 혁신적인 운영으로 빠르게 성장합니다. 특히 NBA와 인접한 시장도 공략했지만 NBA가 등한시 했던 시장도 개척합니다. 인디애나 페이서스, 켄터키 커널스, 댈러스 채퍼럴스, 덴버 로케츠, 뉴올리언스 버커니어스 등 새로운 시장에 구단들이 생겼죠. 또한 3점 라인의 도입, 업템포 농구, 화려한 슬램덩크, 별명을 활용한 PR 등으로 NBA를 위협하게 됩니다.

후발 주자로 첫 시즌에 11개 팀이 창단했던 ABA는 아무래도 NBA보다 선수를 수급하는 것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ABA는 코니 호킨스, 덕 모, 로저 브라운처럼 NCAA에서 승부조작 혐의로 제명을 받아 NBA에서 뛰지 못했던 선수들을 영입했죠. 하지만 갑작스럽게 많이 늘어난 수요를 공급이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ABA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좀 더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합니다. 바로 대학 재학 중인 선수들을 선점하는 것이죠. 이전까지 NBA는 ‘얼리 엔트리(early entry)’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ABA는 달랐습니다. 1969년 ABA의 덴버 로케츠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대표로 뛰었고 디트로이트 대학 2학년이던 괴물 스펜서 헤이우드(203cm)를 영입했습니다. 헤이우드는 2학년 때 경기당 32.1득점, 22.1리바운드(리그 1위)를 기록하며 NCAA를 대표하는 빅맨이었죠. 이후 ABA는 줄리어스 어빙 등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유망주를 선점했고 NBA는 위기감에 빠졌습니다. 이후 헤이우드는 NBA의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계약했고 NBA는 1971년 생계가 곤란한 대학 재학 선수들에게 드래프트 참가를 허용했습니다. 이것이 얼리엔트리의 시초인 ‘하드십 드래프트(hardship draft)’입니다. 처음에는 생계가 곤란한 재학생들만 따로 특별 드래프트를 했지만 1976년 하드십 드래프트는 정규 드래프트에 편입되어 재학생과 졸업생이 같이 드래프트를 치르게 되었죠.

이후로도 ABA와 NBA는 우수 선수들 영입을 위해 전쟁을 치릅니다. 실제로 ABA가 아티스 길모어, 데이빗 탐슨 같은 매우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성공하며 NBA를 위협하기도 했죠. 하지만 대부분의 우수 선수들은 NBA쪽을 더 선호했습니다. 따라서 ABA는 더욱 파격적인 시도를 합니다. 바로 고등학생에게 눈을 돌린 것이죠. 1974년 ABA의 유타 스타스는 고등학생이던 모세스 말론과 계약했습니다. 이듬해인 1975년 NBA 드래프트에서 필라델피아 76ers는 당시 매이너드 에반스 고등학교에서 뛰었던 대릴 도킨스를 지명했고 2라운드 19번으로 애틀랜타 호크스도 드와이트 모로우 고등학교 소속이던 빌 윌로우비를 뽑아 NBA도 고등학생에게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물론 1976년 NBA가 ABA를 흡수합병하면서 약 20년간 고등학생이 대학을 거치지 않고 NBA에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비록 ABA는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졌지만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었던 NBA에 다양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고 현재도 ABA의 유산들은 NBA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NBA 선수 수요와 공급에 일대 대혼란을 야기하기도 했죠.

- 세계화와 해외파 선수들의 등장

1976년 ABA를 흡수합병하면서 NBA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줄리어스 어빙, 조지 거빈, 데이빗 탐슨 등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는 슈퍼스타들이 들어왔기 때문이죠. 그리고 1979년 NBA 역사상 최고의 흥행카드이자 희대의 라이벌인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가 가세합니다. 두 선수는 L.A.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라는 역대 최고 라이벌 팀에 속했고 흑인과 백인, 동부와 서부 게다가 NCAA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맞붙는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안고 NBA를 NFL, MLB에 필적할 만한 리그로 성장시켰죠.

1984년에는 NBA 세계화를 이끌 두 인물이 NBA에 들어옵니다. 바로 데이빗 스턴 총재와 마이클 조던이죠. 스턴은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인기를 끈 NBA라는 컨텐츠를 세계 시장에 내놓을 계획을 세웁니다. NBA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를 전 세계인들에게 알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올림픽 무대에 NBA 선수들이 서는 것이었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데이빗 로빈슨, 미치 리치몬드, 대니 매닝, 댄 멀리 등으로 구성된 미국 대표팀은 준결승전에서 아르비다스 사보니스, 사루나스 마르시울리오니스, 발레리 티코넨코, 사샤 볼코프 등이 이끄는 소련에게 76-82로 패했습니다. 농구 종주국이라 자부하던 미국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1989년 스턴 총재는 당시 FIBA 회장이던 보리슬라프 스탄코비치와 단판을 지어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허용케 했습니다. 이에 따라 동구권 선수들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리그 같은 프로 구단에서 뛸 수 있게 되었죠.

이때 NBA도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1988년과 1989년 샬럿 호네츠, 마이애미 히트,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올랜도 매직 등 무려 4개의 구단이 새로 창단한 것이죠. 4개 구단에 12명의 선수가 있다고 계산하면 48명의 새로운 선수들이 필요했습니다. 드래프트 거의 2개 라운드의 선수들이 더 필요한 것이었죠. NCAA에서 그만한 선수들을 수급한다면 경기력이 저하되는 것은 뻔했습니다. 리그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신생 구단에 들어간 선수들 중 스타들은 없었고 확장 드래프트로 식스맨급 선수들을 잃은 기존 구단들의 선수층도 얇아지니까요. 때마침 스턴 총재의 활약으로 1989년 동구권 선수들이 프로구단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알렉산더 벨로프 등 소련 선수들이 NBA 드래프트에 지명을 받은 적이 있지만 뛰지는 못했죠. 하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NBA급 기량을 보인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블레디 디바츠, 드라젠 페트로비치와 소련 대표팀의 마르시울리오니스, 볼코프가 1989-90 시즌 NBA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성공으로 해외파 선수들 특히 동구권 선수들의 NBA 진출은 봇물 터지는 이뤄졌죠. 결국 1989년 4개 구단의 창단, NBA의 세계화, 동구권 선수들의 프로 진출 허용이라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맞아 떨어지며 NBA는 다시 변화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 캐나다 구단의 창단 그리고 고교선수들의 직행

1995-96 시즌 NBA는 캐나다에 두 개 구단을 창단합니다. 바로 밴쿠버 그리즐리스(현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토론토 랩터스죠. 따라서 다시 NBA 24명 이상의 양질의 새로운 선수들이 더 필요했습니다. 때마침 한 명의 선수가 등장합니다. 고교 시절 최고의 선수였던 케빈 가넷이죠. 가넷은 빈스 카터, 폴 피어스, 스테판 마베리 등 걸출한 동기생들과 맥도널드 올아메리칸 경기에 출전했고 USA 투데이誌 선정 올해의 선수, 존 우든 상 등 고교 최고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상을 쓸어 담았습니다. 하지만 가넷은 ACT(American College Test) 성적 미달로 대학 진학이 어려워졌고 결국 NBA 직행을 선택했죠. 1995년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전체 5번으로 가넷을 지명했습니다. 1975년 도킨스와 윌로우비가 뽑힌 이후 20년 만이었죠. 1989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7번으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뽑힌 숀 켐프를 고등학교에서 NBA로 직행한 선수로 보기도 하지만 켐프는 트리니티 벨리 커뮤니티 컬리지를 다니다 왔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아닙니다.

가넷은 95-96 시즌 10.4득점, 6.3리바운드, 1.8어시스트, 1.1스틸, 1.6블락샷으로 맹활약하며 고교 선수들의 NBA 러시를 주도했습니다. 이후 코비 브라이언트, 저메인 오닐,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등 수많은 고교 선수들이 NCAA가 아닌 NBA를 선택했습니다. 또한 고교생들의 NBA 러시는 캐나다에 2개 구단이 창단하면서 수요가 생겼기 때문에 가능했죠. 물론 현재는 NBA 규정상 고등학생이 NBA에 직행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만약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라는 왕조가 없었고 BAA가 NBL을 흡수합병해 수요가 늘어나지 않았다면 흑인이라는 공급이 조금 더 늦춰졌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흑인이라는 공급이 늘어났지만 다시 수많은 팀들이 해산했고 공급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시대적 배경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만약 ABA가 탄생해 수요가 늘지 않았다면 NBA에는 얼리엔트리와 고교생이라는 공급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1988, 89년 4개 팀의 확장과 세계화 정책이 없었다면 우리는 수많은 해외파 선수들을 보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1995년 캐나다에 2개 팀이 생기지 않았고 케빈 가넷이 ACT를 통과했더라면 아니면 가넷이 NBA에서 실패했더라면 고교생들의 NBA 러시는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NBA팬들이 원하는 경기의 질(수요와 공급의 법칙에서 가격)이 고정된 상태에서 수요가 늘어났을 때 그에 맞는 가격을 위해서 새로운 공급이 늘어난 것은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 NBA의 구단수 변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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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 김민석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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