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야오밍, 그가 걸어온 길
- NBA / jhj / 2011-07-12 06:17:33

(바스켓코리아) ‘만리장성’ 센터 야오밍이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9일(이하 한국시간) 야후 스포츠(http://sports.yahoo.com/nba)는 “휴스턴 로케츠의 센터 야오밍이 은퇴를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NBA에 데뷔한지 단 9년만이다. 물론 9년도 짧은 세월은 아니다. 하지만 당초 야오밍의 잠재력과 존재감 그리고 주위의 기대를 고려하면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짧지만 굵은 선수생활을 보냈던 야오밍의 지난 9년을 돌아보았다.
범상치 않았던 등장
229cm, 141kg 먼저 신체조건이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여기에 기동성은 더욱 놀라웠다. 여느 장신 빅맨들과는 다르게 코트를 민첩하게 오갔다. 또한 페인트존 밖에서도 득점이 가능했다. 2002년 NBA는 그렇게 한 선수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가 바로 야오밍이다. 보통 아시아권 선수가 NBA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10대 때부터 CBA(중국 프로 리그: Chinese Basketball Association)를 평정했던 야오밍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등 국제대회를 통해 점차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자연스레 NBA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결국 야오밍은 프로 5년째에 접어든 2002년 NBA 진출을 선언했다. 당시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휴스턴 로케츠는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야오밍의 NBA 데뷔 과정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중국 정부에서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 팀에 입단할 것, 국가대표팀 소집 시 반드시 참여할 것 등 까다로운 조건을 많이 내걸었기 때문이다. 이에 몇몇 전문가는 휴스턴이 야오밍을 포기할 것이라 내다보기도 했다. 드래프트 전까지도 상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휴스턴은 야오밍을 쉽게 놓지 못했다. 결국 휴스턴은 중국 정부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하며 그토록 바라던 야오밍을 손에 넣었다. 아시아 최고 센터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NBA에 첫 발을 내디뎠다.
아시아를 넘어 NBA를 대표하다
야오밍의 NBA 데뷔전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2002년 10월31일 인디애나 페이서스 전에서 신고식을 치렀지만, 무득점에 그치는 수모를 맛봤다. 단 11분을 뛰는 동안 파울은 무려 3개. 누가 봐도 실망스러운 성적이었다. 이후에도 야오밍의 부진은 계속되었다. 시즌 첫 6경기를 치를 때까지 총 득점은 단 20점에 불과했다. 이 중 개막전을 포함, 두 번이나 무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오밍은 11월16일 피닉스 선즈 전에서 처음으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이후 점차 적응력을 키웠다. 그리고 12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기량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12월 한 달간 단 한 차례만 한 자릿수 득점에 그칠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다. 1월에 접어들어서는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팀의 4연승을 이끄는 등 여전히 위력을 나타냈다.
그 결과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는 거물 샤킬 오닐을 제치고 서부지구 주전 센터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물론 온라인 투표에서 중국인들의 영향력이 크기도 했지만, 현장 투표에서도 오닐보다 많은 표를 얻어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후반기에서도 꾸준한 기세를 나타냈다. 전 경기에 주전으로 나선 것은 물론, 당시 팀의 시즌 최다인 5연승을 이끄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이렇듯 야오밍의 루키 시즌은 성공적이었다. 성적 역시 평균 13.5득점 8.2리바운드 1.7어시스트 1.8블록슛을 기록, 자신의 명성을 톡톡히 증명했다. 비록 신인왕은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가 차지했지만, NBA 올-루키 퍼스트 팀에 선정되며 향후 시즌을 더욱 기대케 만들었다.
두 번째 시즌 실제로 야오밍은 훨씬 발전한 기량으로 돌아왔다. 마침 루디 톰자노비치 前 감독의 후임으로 지휘봉을 잡았던 제프 밴 건디도, 야오밍 위주로 팀을 개편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야오밍은 전 시즌에 비해 무려 4점이 오른 평균 17.5득점을 기록, 스티브 프랜시스를 밀어내고 단 두 시즌 만에 팀 내 득점 1위에 올랐다. 또한 생애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으며 뜻 깊은 소포모어 시즌을 보냈다. 이어진 2004-2005시즌 야오밍은 더욱 일취월장한 플레이로 골밑을 지배했다. 득점, 야투 성공률, 블록슛 부문에서 당시 통산 최고를 기록하며, 소포모어 시즌의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새로이 맞이한 동료인 트레이시 맥그레디와는 원-투 펀치를 결성, 휴스턴을 서부지구 5위로 이끄는 등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만난 댈러스 매버릭스에 7차전 끝에 패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지만, 실망보다는 다음 시즌에 대한 희망이 더 컸다. 야오밍 역시 맥그레디와 함께 팀의 도약을 이끈 것은 물론, 어느새 NBA 간판 센터인 오닐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호적수, 오닐
야오밍이 등장했을 때 농구 팬들이 깊은 관심을 나타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닐의 맞상대로 이만한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리그 골밑은 말 그대로 ‘오닐 천하’였다. 사실상 그 외 다른 센터들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 정도로 오닐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이에 팬들은 늘 뻔한 판도에 싫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야오밍이 출현하자 사정은 급변했다. 팬들은 “드디어 오닐의 라이벌이 등장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 빨리 두 선수가 대결하길 손꼽아 기다렸다. 2003년 1월 18일, 드디어 야오밍과 오닐의 첫 만남이 성사됐다. 당시 관중석에는 오닐의 아버지와 야오밍의 양친 그리고 하킴 올라주원과 모제스 말론이 자리했을 정도로 많은 이의 이목을 끌었다.
결과는 야오밍의 판정승이었다. 개인 성적에선 야오밍(10득점 10리바운드 6블록슛)이 오닐(31득점 13리바운드)에 크게 밀렸지만, 휴스턴이 연장 접전 끝에 LA 레이커스를 눌러 희비가 엇갈렸다. 특히 야오밍은 연장전에서 팀의 승리를 확정 짓는 덩크슛을 터뜨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두 선수는 만날 때마다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정작 라이벌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워낙 경력차가 컸고, 전성기를 맞은 시점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드와이트 하워드의 등장은 지각변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팬들 역시 야오밍과의 새로운 라이벌 구도 형성에 큰 기대감을 나타냈지만, 야오밍이 전성기에 접어들자마자 잦은 부상에 시달려 정면대결을 벌인 경기는 극히 드물었다. 팬들에겐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짧은 전성기를 함께 했던 맥그레디
야오밍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바로 맥그레디다. 두 선수가 처음 손을 맞잡은 것은 2004-2005시즌이었다. 당시 휴스턴은 올랜도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맥그레디를 영입했다. 맥그레디 포함, 무려 6명의 선수가 팀을 옮긴 대형 트레이드였다. 휴스턴은 우승을 위해선 보다 확실한 슈퍼스타가 필요하다고 판단, 이에 프랜차이즈 스타로 홈 팬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던 프랜시스를 과감히 매물로 내놓고 맥그레디를 로스터에 채웠다.
팬들은 각자의 포지션에서 최고로 평가 받는 두 선수의 만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코비 브라이언트-오닐 콤비보다 더 나은 조합이 될 것이다”며 우승은 시간문제라 전망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과연 야오밍-맥그레디 원-투 펀치의 위력은 대단했다. 두 선수는 결성한지 첫 시즌만에 평균 44.0득점 14.6리바운드 6.1어시스트를 합작한 것은 물론, 팀을 8년만에 처음으로 50승 이상으로 이끌며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나타냈다. 비록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만난 댈러스 매버릭스에 3승 4패로 아깝게 무너지긴 했지만, 모두 실패라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앞길이 창창했다.
이어진 2005-2006시즌 팬들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 휴스턴을 우승후보로 지목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휴스턴은 단 40승도 올리지 못하며 플레이오프에 탈락하고 만다. 문제는 부상이었다. 특히 팀의 주축인 맥그레디와 야오밍은 각각 등 부상과 발 부상으로 47경기, 57경기에 결장해 전혀 팀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당시에는 모두 충분히 있을 만한 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재앙의 시작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후 두 선수는 번갈아 부상을 당했다.
두 선수는 2004-2005시즌에 호흡을 맞춘 이래 70경기 이상을 소화한 시즌이 각각 두 번씩에 불과할 정도로 부상에 신음하는 날이 많았다. 심지어 동 시즌에 함께 70경기 이상을 소화한 적도 2004-2005시즌이 유일했다. 이 뿐만 아니다. 2004-2005시즌 이후에는 플레이오프에서조차 동시 출장한 것이 고작 7경기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연스레 팀 운영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휴스턴은 오프시즌과 드래프트에서 좋은 수완을 발휘, 셰인 베티에(2006년 여름에 영입), 론 아테스트(2008년 여름에 영입), 루이스 스콜라, 칼 랜드리(2007-2008시즌 데뷔) 등을 영입하며 전력 출혈을 최소화했지만, 그토록 바라던 우승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결국 휴스턴은 2009-2010시즌 도중 맥그레디를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렇게 야오밍-맥그레디 시대는 막을 내렸다. 두 선수는 떨어지고 난 후 더욱 암울한 길을 걸었다. 쫓기듯 팀을 떠난 맥그레디는 단 한 시즌만에 뉴욕에서 방출, 가까스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둥지를 트는 등 졸지에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고, 야오밍 역시 2008-2009시즌 팀을 13년만에 처음으로 서부지구 세미파이널로 견인한 후, 또 다시 부상에 무너지며 지난 시즌 단 5경기에 나선 것을 마지막으로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야오밍의 은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여기저기서 아쉬운 반응을 나타냈다. 특히 국내 농구 팬들의 안타까움은 더했다. 야오밍이 아시아 농구 저변 확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야오밍이 없었다면 하승진의 NBA 진출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야오밍은 아시아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한편 한때 야오밍과 뜨거운 경쟁을 벌였던 오닐은 10일,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http://www.tout.com/yet74p)에 야오밍의 그간 공로를 치켜세우는 메시지를 담은 동영상을 올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야오밍에 대한 추억 하나- 찰스 바클리의 ‘당나귀 엉덩이 키스’
야오밍은 루키 시즌 초반 NBA 적응에 애를 많이 먹었다. 개막전에서 무득점에 그친 것은 물론, 시즌 첫 6경기에서 모두 한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는 등 전혀 1순위 출신다운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 그러자 당시 바클리는 케니 스미스와 함께 진행하는 TNT(미국 케이블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만약 야오밍이 올 시즌에 19득점 이상을 기록한다면 당나귀 엉덩이 키스를 하겠다”고 폭탄발언을 하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야오밍은 2002년 11월18일 레이커스 전에서 보란 듯이 20득점을 올리며 바클리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실제 바클리는 프로그램 녹화 도중에 제작진이 섭외한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로 희대의 명장면을 남겼다. (영상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hxb8cONyZTI)
바스켓코리아 조지형 / 사진 ESPN.COM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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