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왓킨스 뒤를 이은 원주 골밑의 수호신, 레지 오코사
- BAKO INSIDE / 이재승 기자 / 2022-07-09 22:22:26

※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5월호에 게재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1년 정기 구독 링크,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5월호 구매 링크)
원주 동부(현 DB)는 그간 김주성이라는 훌륭한 토종 빅맨과 함께 유능한 외국 선수를 데려오면서 막강한 골밑 전력을 꾸렸다. 자밀 왓킨스를 시작으로 레지 오코사를 거쳐 로드 벤슨까지 여러 해 동안 강한 전력을 뽐내며 우승 및 우승 도전에 나설 수 있었다. 지난 시간에 ‘원주산성’의 토대를 다진 왓킨스를 살펴본 만큼, 이번에는 오코사를 들여다보면서 당시 동부의 전력과 리그에 대해 되돌아봤다.
KBL 진출 이전
오코사는 미국 델라웨어주 클레이먼트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까지 무난한 선수 생활을 보낸 그는 VCU(Virginia Commonwealth University)에 진학했다. NCAA CAA(Colonial Athletic Assocation)의 대학이었다. 2012년에 컨퍼런스 개편을 통해 현재는 애틀랜틱 10 컨퍼런스에 속해 있으며, 지난 2011년에 파이널포에 처음 진출한 바 있다. 그러나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으며, 여러 차례 당시 CAA 정상을 밟았고, 토너먼트에 나섰으나 오코사가 재학하는 동안에는 좀처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첫 시즌부터 오코사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긴 어려웠다. 당시에도 명문 대학과 거리가 다소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도 그리 이름을 떨친 이가 아니었기에 주전급으로 나서기 쉽지 않았다. 오코사는 지난 1998-1999 시즌 31경기에 나섰다. 이중 6경기에서 주전으로 출장하기도 했다. 경기당 17.8분을 소화하며 4.2점(필드골 성공률 : 46.6%, 3점슛 성공률 : 00.0%, 자유투 성공률 : 52.5%) 5.3리바운드 0.4어시스트 0.7스틸 0.6블록을 기록했다. 기록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주로 벤치에서 나서면서 백업 파워포워드 역할을 도맡았다. 당시에는 파워포워드가 외곽슛을 장착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오히려 센터를 도와 안쪽에서 몸싸움과 리바운드에 기여해야 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오코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VCU는 CAA 정규시즌에서 8승 8패에 그쳤다. 평균 71.6점을 올리면서 많은 득점을 올렸으나, 수비에서 경기당 71.4점이라는 많은 점수를 내주며 많은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컨퍼런스 6위에 그치면서 정상을 넘보기에 모자랐다. 오코사 외에도 같이 뛰었던 선수들을 보면 정상을 넘보기 쉽지 않은 전력임에는 분명했다. 당시 CAA는 다른 컨퍼런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치열한 곳이 아니었음에도 VCU가 컨퍼런스 토너먼트 진출을 노리기 쉽지 않았다. 이는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VCU는 7승 9패로 이전 시즌보다 못했다. 평균 득점이 소폭 줄었으며, 실점은 늘었다. 아쉽게 컨퍼런스 5위에 그친 것. 그 사이 4위에 그친 UNC 윌밍턴이 전미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 초청이 됐다. 아쉽게도 오코사는 이 때 전국적으로 첫 선을 보일 기회를 잡기에 모자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2학년이던 지난 1999-2000 시즌에 28경기에 나서 이중 8경기에서 주전으로 출장하기도 했다. 평균 21.1분을 뛰며 6.7점(필드골 성공률 : 40.4%, 3점슛 성공률 : 00.0%, 자유투 성공률 : 62.8%) 6.6리바운드 0.7어시스트 0.9스틸 0.9블록을 기록했다. 이전 시즌 대비 전반적인 출전시간은 늘었으나 야투 성공률이 줄어들면서 효율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대신 자유투 성공률이 늘었고, 출전시간 증가에 따라 리바운드가 늘어나면서 VCU에서 주전급 전력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오코사의 성장에도 VCU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전학을 택했다. 한 시즌 뛰지 않기로 하는 대신 라살 익스플로러스로 전학을 택했다. 학교를 옮기면서 2000-2001 시즌을 뛰지 못했으나, 2001-2002 시즌에는 주요 전력으로 구슬땀을 흘릴 수 있었다. 당시 그와 함께 했던 이중 NBA에 진출한 이도 있었는데, 바로 그가 라슈얼 버틀러(1998 드래프트 2라운드 24순위)가 있었다. 그는 32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나서면서 주전 빅맨으로 입지를 굳혔다. 경기당 28.3분을 뛰며 11.3점(2점슛 성공률 : 45.1%, 3점슛 성공률 : 13.3%, 자유투 성공률 : 58.1%) 8.2리바운드 0.3어시스트 1.2스틸 0.7블록을 기록했다. 당해 시즌 오코사는 공격 리바운드만 평균 네 개를 따내면서 보드 장악에서 팀에 큰 힘이 됐다.
오코사는 대학 시절 리바운드에서 두각을 보였다. VCU와 라샬에서 뛰는 세 시즌 동안 공이 정규시즌 누적 리바운드와 평균 리바운드 순위 2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첫 시즌에 1학년임에도 해당 부문 13위에 올랐던 그는 이듬해에 8위를 거쳐, 라샬에서 뛸 때는 A-10 컨퍼런스 3위에 오르는 저력을 발휘했다. 평균 리바운드도 15위와 6위를 거쳐 3위에 올랐을 정도로 제공권 싸움에서 두각을 보였다. 빠른 농구와 스트레치 빅맨이 득세하기 이전의 정통적인 파워포워드로서의 면모를 여과 없이 발현했다. 블록도 마찬가지. 누적 블록과 평균 블록에서 꾸준히 20위 이내에 자리했으며, 평균 블록은 15위 이내에 위치했을 정도로 2선 수비에서 발현되는 영향력도 결코 적지 않았다. 실제로, 이에 힘입어 지난 2001-20002 시즌 A-10 컨퍼런스에서는 수비기여도 1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비록 NBA에 진출하기에는 신체 조건과 기술적인 측면에서 합격점을 받기 어려웠으나, 그는 국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재능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대학 재학 시절 기록을 40분으로 환산했을 때 수치가 대폭 늘어나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기여도와 효율이 나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원주에서 2007-2008 시즌
KBL은 지난 2004-2005 시즌부터 세 시즌부터 종전 드래프트가 아닌 자유계약을 통해 외국 선수를 영입했다. 이 기간 동안 빼어나다 못해 리그를 지배하는 숱한 선수들이 나오면서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국내 선수의 역할은 좀 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프로농구는 2007년부터 다시 드래프트를 통해 외국 선수를 선발하기로 했다. 2007년부터 다시 드래프트에 나서는 만큼, 직전 시즌의 순위가 여러모로 중요했다. 높은 순번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느 팀이 어떤 선수를 데려갈 지도 관심을 모았다. 오코사는 이 때 KBL 외국 선수 트라이아웃에 명함을 내밀었다. 드래프트를 거쳐야 하긴 했지만, 국내 무대에서 뛰길 바랐다. 이 때 1순위는 동부의 것이 됐다. 동부의 전창진 감독은 오코사를 지명했다. 안쪽에서 수비와 이타적인 플레이가 돋보이는 그가 김주성과 함께 높이를 책임지기 충분했기 때문. 이어 2라운드에서는 마지막 순번으로 윌리 팔리를 지명했으나, 오프시즌에 로저 워싱턴으로 교체가 됐다.
오코사는 1순위 지명자다운 면모를 어김없이 발휘했다. 그는 다른 외국 선수가 교체되는 와중에도 리그에 무난하게 적응했다. 54경기에 모두 출장하며 남부럽지 않은 내구성을 자랑한 그는 평균 18.4점(2점슛 성공률 : 61%, 3점슛 성공률 : 21%, 자유투 성공률 : 65%) 12.3리바운드 2.7어시스트 1.7스틸 1.0블록을 기록하며 동부가 리그 1위에 오르는 데 가히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수비에서는 김주성과 함께 상대 빅맨의 공격을 제어하면서도 외곽에서 시도하는 돌파를 유효 적절하게 견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주성이나 오코사를 제친다고 하더라도 다른 선수가 도움 수비를 올 수 있기에 다른 구단이 동부를 상대하기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공격에서는 기록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무려 60%가 넘는 성공률을 자랑하며 순도 높은 득점을 올렸다.
오코사가 안쪽에서 확률 높은 득점을 올리면서, 김주성도 이 때부터 간헐적으로 중거리슛을 시도할 여유를 얻었다. 김주성은 프로 진출 초창기만 하더라도 공격에서 제약이 적지 않은 빅맨이었다. 그러나 오코사와 뛸 때 본격적으로 중거리에서도 공격을 시도했다. 왓킨스와 함께 할 때부터 간헐적으로 시도했으나 김주성도 생존을 위해 슛의 정확도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마침, 오코사가 안쪽에서 무난하게 역할을 하면서 김주성도 슛이 좋아질 여력이 마련됐다. 김주성이 중거리를 오가는 사이 외곽에서 역할을 해야 하는 다른 외국 선수는 두 번의 교체 끝에 카를로스 딕슨으로 낙점이 됐다. 딕슨이 힘을 냈고, 강대협, 이광재가 3점슛을 던질 수 있었다. 특히, 강대협은 벤치에서 출격해 쏠쏠한 활약을 펼쳤고, 표명일과 이세범은 번갈아 가면서 운영을 도맡았다.
이에 힘입어 동부는 38승 16패의 호성적을 거두었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보다 놀라운 것은 동부가 단 48경기 만에 리그 1위를 확정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까지 최단 기록으로 남아 있다. 지난 2001-2002 시즌부터 구단별로 54경기씩 치르고 있는 가운데 최단 경기에서 정규시즌 우승이 결정된 것이다. 1위를 차지하면서 준결승에 직행한 동부는 안양 KT&G 카이츠(현 KGC)를 맞아 3승 1패의 압승을 거뒀다. 당시 KT&G는 마퀸 챈들러와 주희정이 이끄는 공격적인 농구를 추구했다. 그러나 높이와 확률을 두루 갖춘 동부를 넘어서긴 모자랐다.
준결승을 속히 통과한 동부는 결승에서 서울 삼성과 마주했다. 삼성은 테렌스 레더를 앞세워 결승까지 오르는 저력을 발휘했으나 우승에 다가서긴 모자랐다. 삼성은 리그 2위인 전주 KCC에 한 경기 차이로 3위로 시즌을 마쳐 1라운드를 치러 준결승에 올랐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서장훈이 이끄는 KCC를 따돌리면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당시 시리즈는 2007년에 삼성에서 KCC로 서장훈이 이적했다. KCC는 서장훈과 함께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으나, 서장훈을 떠나보낸 삼성이 보상선수로 데려온 이상민과 함께 KCC를 따돌리고 결승에 올라간 것이다. 삼성이 결승에 오르는데 필요한 경기는 단 세 경기에 불과했다. KCC는 시리즈 중 단 한 경기도 따내지 못했다.
결승에서도 여느 경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레더가 어김없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으나, 동부의 수비를 혼자서 감당하긴 어려웠다. 정규시즌에서도 동부가 삼성을 상대로 4승 2패로 상대 전적에서 우위를 점했던 만큼, 동부가 시리즈를 유리하게 풀어갈 것으로 여겨졌다. 아니나 다를까 동부에서는 결승 1차전에서 오코사가 이날 최다인 32점을 퍼부었고, 김주성도 20점을 더했다. 반면, 백코트에 우위를 자신했던 삼성은 전반에만 무려 14실책을 범하면서 자멸했다. 2차전에서는 김주성이 가장 많은 36점을 퍼부었고, 표명일이 15점 9어시스트로 활약했다. 표명일은 이상민과 KCC에서 뛸 당시 백업 가드로 역할을 했으나, 이날은 이상민에 판정승을 거뒀다.
동부는 원주에서 열린 2연전을 무난하게 쓸어 담으면서 우승에 성큼 다가섰다. 삼성은 안방에서 반격의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 3차전에서는 접전 끝에 삼성이 웃었다. 삼성은 이날 88-87로 1점 차 승부 끝에 웃었다. 동부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에 오코사가 자유투를 얻었으나 모두 집어넣지 못하면서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 가지 못했다. 시즌 내내 자유투에서 아쉬움을 남긴 오코사였기에 여러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동부는 4차전에서 곧바로 삼성의 기세를 꺾었다.
2차전에 표명일 등장했다면, 4차전에서는 이광재가 나타났다. 이날 이광재는 3점슛 두 개를 포함해 16점 3어시스트 4스틸로 활약하면서 동부의 승리에 힘을 더했다. 그 사이 삼성은 이날도 많은 실책을 저지르며 자멸했다. 이날에만 무려 20개의 실책을 범하면서 분위기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승 3패로 몰린 삼성은 남은 경기를 모두 이겨야 했다. 그러나 시리즈의 반전을 꾀하기에는 격차가 커보였다. 5차전에서 동부는 90-74로 완승을 거뒀다. 이날 동부는 삼성에 단 한 번의 리드를 내주지 않으면서 경기를 매조졌다. 김주성은 이날 40분을 모두 소화하며 양 팀에서 가장 많은 29점을 올렸고, 오코사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했다. 동부는 삼성에 4승 1패를 우위를 점하며 시리즈를 끝냈다. 이로써 동부는 지난 2004-2005 시즌에 이어 구단 역사상 세 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모기업이 바뀐 이후 첫 우승이라는 감격을 맛봤다.
원주와 대구에서의 2008-2009 시즌
동부의 강세는 이듬해에도 계속됐다. 오코사와의 재계약은 당연했다. 다른 외국 선수로는 딕슨이 아닌 웬델 화이트를 지명했다. 오코사와 화이트는 시즌 중반까지 활약했다. 오코사는 어김없이 부상이 없는 시즌을 보냈다. 2년 연속 전 경기 출장에 성공한 그는 54경기에서 17.8점(2점슛 성공률 : 58%, 3점슛 성공률 : 28%, 자유투 성공률 : 76%) 9.2리바운드 2.0어시스트 1.6스틸 0.7블록을 기록하며 변함없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동부도 33승 21패로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다. 리그 1위인 울산 모비스에 두 경기 차 뒤진 2위로 충분히 직전 시즌 우승을 차지한 전력임을 뽐냈다.
하지만 동부는 시즌 중에 오코사를 트레이드하기로 했다. 당시 오코사는 다른 구단에 다소 읽힌 모습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여느 선수들이 2년 차에도 굳건히 활약을 하곤 한다. 대개의 경우 익숙하더라도 크게 간파당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부의 전 감독은 오코사의 활약을 두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전반적인 리그 분위기를 볼 때 안쪽 공격에서 힘을 내줄 빅맨을 찾기로 했다. 이에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 오리온)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크리스 다니엘스를 데려오고 오코사를 보냈다.
오코사는 오리온스에서 김승현, 이동준과 함께 하게 됐다. 그러나 핵심 전력인 김승현이 부상으로 조기에 시즌을 마치면서 오코사도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오리온스는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18승 36패로 리그 9위로 시즌을 마쳤을 정도로 전력이 좋지 않았다. 오코사도 시즌 중에 트레이드된 만큼, 기존 오리온스 선수들과 호흡을 제대로 맞추기 쉽지 않았다.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서 오코사도 한계를 보였다. 시즌 평균 기록은 변함이 없었으나 오리온스에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나마 오리온스는 전반기에 치른 25경기에서 13승 12패로 선전하기도 했으나 후반기 들어 크게 흔들렸나. 전력의 중심인 김승현과 다니엘스가 모두 빠진 셈이 됐다. 마지막 29경기에서 5승 24패로 크게 무너지면서 리그 9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동부는 리그 2위로 2년 연속 준결승에 올랐으나 KCC에 패하고 말았다. 오코사가 빠지면서 KCC의 하승진을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다니엘스가 들어오면서 공격력은 대폭 보강이 됐으나 수비에서 하승진을 맞이하긴 어려웠다. 결국, 동부는 준결승에 직행을 했음에도 시리즈를 내주고 말았다. 동부를 꺾은 KCC는 결승에서 삼성과 7차전까지 치른 접전 끝에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시즌 후 오코사는 재계약에 실패했다.
이후 부산을 거쳐
지난 2008-2009 시즌 이후 그는 재계약을 맺지 못했다. 이후 중국과 필리핀 등 다른 나라 리그를 거쳤던 그는 지난 2011-2012 시즌 도중 다시 KBL로 돌아오게 됐다. 부산 KT(현 수원 KT)가 찰스 로드의 부상을 대체하기 위해 그를 불러들인 것. 당시 KT는 전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던 만큼, 적응력이 딱히 필요치 않을 것으로 여겨졌던 그를 불러 들였다. 비록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하지 못했지만, KT에서도 뛰면서 로드의 빈자리를 잘 채웠다. 지난 2011-2012 시즌은 외국 선수가 기존 2인 보유 1인 출전이 아닌 1인 보유 1인 출전으로 바뀌었다. 이에 외국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중요했다. 이들이 다치지 않는 것도 필요했으나, KT는 로드의 부상을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오코사가 아쉬운 데로 땜질에 나서면서 전력 누수를 최소화했다.
이색적인 장면도 잇따랐다. 당시 KCC는 디션 심스를 내보내고 왓킨스를 데려왔다. 동부가 이전 시즌에 함께 했던 로드 벤슨을 보유하고 있는 가운데 원주에서 우승 경험이 있는 왓킨스와 오코사가 각기 다른 팀에 둥지를 틀면서 원주 출신의 외국 선수가 자웅을 겨루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비록 왓킨스와 오코사 모두 전성기가 지난 시점이었지만, 노련한 면모를 뽐내며 팀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공교롭게도 이 때 벤슨을 택한 동부와 크리스 윌리엄스와 함께 한 오리온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상 및 기량 미달로 외국 선수를 교체한 바 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지난 2014-2015 시즌 도중에도 KT의 부름을 받았다. KT는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마커스 루이스를 호명했다. 그러나 루이스의 활약을 찾는 것이 거의 쉽지 않았을 정도. 이에 시즌 중에 에반 브락으로 교체했으나 브락의 경기력도 신통치 않았다. 이에 KT는 다시금 오코사를 불러들였다. 노장 대열에 들어선 그였지만, 백업 센터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로드를 주전으로 내세운 가운데 오코사가 남은 시간을 메워야 했다. 반대로, KT가 오코사를 두 번이나 걸쳐 불러들였다는 것 만으로도 당시 KT의 외국 선수 지명이 다소 엇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끝으로 그는 KBL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KT의 부름을 받기 전 중국에서도 대체 선수로 여전한 기량을 발휘했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필리핀에서도 뛰었다. 많이 옮겨 다녀야 했지만, 꾸준히 프로농구 선수로 생활을 지속했다. 그러는 도중 지난 2019년에 비자 발급을 위해 한국을 경유한 적이 있다. 지난 2017-2018 시즌에 필리핀에서 뛴 것을 끝으로 프로농구 선수로서의 삶은 끝냈지만, 여전히 농구를 지속하고 있었다. 중국 실업무대에 뛰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됐으며, 여유 시간이 있었던 만큼, DB의 사무국을 찾아 트로피를 만지면서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직접 경기장을 찾았으며, 원주를 방문해 원주팬들을 조우하기도 했다. 참고로 그의 오른팔에는 ‘의리’라는 우리말로 큼지막한 문신을 새겨 놓았다. 해당 단어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다고. 그러나 이 때 이후 그는 아직 한국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당시 한국에 꾸준히 들리고 싶다는 말을 남겼으나 코치로 선임이 되거나 관광이 아닌 이상 한국을 찾기 쉽지 않다. 하물며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국가 간 이동이 쉬워진 부분도 없지 않아 보인다.
참고로, 그는 지난 2014년에도 한국을 찾은 바 있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2014 농구 월드컵과 2014 아시안게임을 위해 오프시즌을 모두 보냈다. 많은 연습경기에 나서기도 했으며, 당시 외국 선수들로 구성된 팀과의 경기도 벌인 바 있다. 당시 외국 선수팀에 오코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코사는 2014년에 인천삼산체육관에서 열린 경기에서 코트를 누볐다.
사진_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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