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한 시즌으로 충분했던 조 잭슨의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

BAKO INSIDE / 이재승 기자 / 2024-04-03 10:40:43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4년 3월호에 게재했다. (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KBL은 지난 2015년 여름에 외국 선수 제도를 바꿨다. ‘2인 보유-1인 출전’에서 ‘2인 보유-제한적 2인 출전’하게 됐다. 조 잭슨은 이때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고양 오리온(현 고양 소노)에서 한 시즌을 뛴 그는 교체 대상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오리온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로 진출 이전
잭슨은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정 환경이 온전치 않았다.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가족의 다툼이 잦았다. 또한, 살기 좋지 않은 곳에 기거하고 있었기에, 충돌도 많았다. 이로 인해, 잭슨은 두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잭슨도 학창 시절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할머니의 끊임없는 돌봄과 관심에 힘입어, 조금씩 나아졌다.  농구가 큰 도움이 됐다.
 

화이트스테이션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잭슨은 4학년이던 지난 2009~2010시즌에 무려 평균 29.3점 6.2리바운드 3.9어시스트에 2.8개의 스틸로 코트를 지배했다. 고교 4년 동안 누적 3,451점을 올린 잭슨은 구역 내 고등학교 선수 중 역대 두 번째로 많은 득점(경기당 23.2점)을 올렸다. 

 

당시 멤피스에서는 그의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 고교 시절 이름을 떨친 잭슨은 테네시주 최고 선수로 부상했다. 맥도널드 올-아메리칸에도 선정됐다.
 

멤피스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멤피스 타이거스는 앤퍼니 하더웨이와 크리스 더글라스-로버츠, 타이릭 에반스, 데릭 로즈(현 NBA 멤피스 그리즐리스)를 배출한 명문 학교. 다수의 가드가 NBA 무대를 누볐기에, 잭슨의 멤피스 진학도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대학 무대의 문턱은 높았다. 신입생이던 2010~2011시즌에 평균 9.9점 3.1어시스트에 그쳤고, 이듬해인 2011~2012시즌에는 경기당 11점 3.8어시스트를 올린 것이 전부였다. 고교 시절 코트를 호령했던 것에 비하면, 잭슨의 멤피스대 시절 퍼포먼스는 아쉬웠다.
 

멤피스의 전력이 대단한 것도 컸다. 잭슨이 1학년일 때, 멤피스는 C-USA 컨퍼런스 정규시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에 힘입어 컨퍼런스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잭슨의 기록은 돋보이지 않았다. 다만, 잭슨은 팀을 정상으로 견인했다. 특히, 토너먼트에서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2년 연속 토너먼트 MVP가 됐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첫 두 시즌 동안 기록적인 면에서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다. NBA에 도전하기에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3학년 때부터 두각을 보였다. 평균 13.6점 4.8어시스트 3.3리바운드에 1.7개의 스틸로 활약했다. 경험까지 더한 잭슨은 더 강해졌다.
 

멤피스는 컨퍼런스 정규시즌에서 단 한 경기도 패하지 않았다. 그리고 잭슨은 처음으로 NCAA 토너먼트에 나섰다. 첫 경기에서 이겼으나, 32강전에 패배.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을 기회를 놓쳤다. 대신, 그는 ‘컨퍼런스 선정 올해의 선수’가 됐다. 팀을 전승으로 이끌었고, 대학 누적 1,000점을 돌파했기 때문. 무엇보다 팀을 전미 토너먼트로 이끌었다.
 

4학년 때 좀 더 나아진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네이스미스 올해의 대학 선수’에도 이름을 올리며, 주가를 더욱 높였다. 비록 평균 15점 고지를 넘지 못했으나, 대학 진출 이후 기록적으로 가장 돋보이는 시즌을 보냈다. 대학에서 4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한 만큼, 그의 시선은 프로 무대로 향해 있었다.

고양에서 주춤했던 시즌 초반
잭슨은 지난 2014년에 열린 NBA 드래프트에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나 졸업반이자 큰 신장을 갖추지 못했기에, 지명을 받지 못했다. 그 후 2014 NBA 서머리그에서 멤피스 소속으로 나섰고, 시즌 직전인 9월에 피닉스 선즈의 트레이닝캠프에서 뛰었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 이후 피닉스 산하인 베이커스필드 잼(현 노던 애리조나 선즈)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잭슨은 시즌 종료 후 태평양을 건너기로 했다. KBL이 마침 외국 선수 제도를 바꾸면서, 잭슨 같은 단신 선수도 KBL에서 뛸 기회를 얻은 것. 그는 2라운드 4순위로 고양 오리온의 부름을 받았다.
 

오리온은 10개 구단 중 유일하게 센터를 지명하지 않았다. 1라운드에서 포워드인 애런 헤인즈를 선발했기 때문.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승현(현 부산 KCC)과 장재석(현 울산 현대모비스) 등 토종 빅맨과 김동욱-허일영(현 서울 SK)-최진수(현 울산 현대모비스) 등 다수의 장신 포워드가 존재했기 때문.
 

포워드 라인의 힘을 업은 잭슨은 2015~2016시즌 전에 열린 프로 아마 최강전에서 좋은 퍼포먼스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시즌에 들어서자, 들쑥날쑥했다. 헤인즈 중심의 팀 농구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했기 때문. 2쿼터와 3쿼터에 무조건 뛸 수 있었음에도, 당시 추일승 오리온 감독이 간헐적으로 잭슨을 불러들였을 정도.
 

그러나 오리온은 헤인즈와 다수의 토종 빅포워드를 내세워 승승장구했다. 반면, 백코트 전력이 취약했던 만큼, 잭슨의 힘이 아쉬웠다. 그가 힘을 보태지 못하면서, 오리온도 우승 후보로서의 위력을 떨치지 못했다.
 

시즌 초 자신감 넘쳤던 잭슨은 다소 주춤했다. 그래서 헤인즈와 김동욱이 쉴 때, 경기 운영에서 보탬이 될 만한 카드가 없었다. ‘잭슨을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도 꽤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잭슨은 동료인 장재석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연습 도중 크게 부딪친 것. 그렇지만 의지를 다잡았고, 추일승 감독과의 면담에서 좀 더 많은 공격 권한을 요구했다.
 

잭슨은 2015년 11월 21일에 열린 창원 LG와의 원정 경기에서 모처럼 펄펄 날았다. 이날 19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21점 차까지 밀렸던 팀의 대역전극을 주도했다. 경기 중에는 김종규(현 원주 DB)를 앞에 두고, 인 유어 페이스(In Your Face) 덩크를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잭슨이 나설 때, 다른 구단이 지역방어로 잭슨의 돌파 동선을 저지했다. 지역방어를 많이 경험하지 못했던 잭슨은 상대 지역방어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잭슨의 위력이 다시 한 번 반감됐다.
 

하지만 오리온의 결정적인 위기는 따로 있었다. 주포인 헤인즈가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기 때문. 그래서 오리온은 제스퍼 존슨을 대체 선수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이게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고양에서 나아진 시즌 중후반
물론, 존슨에 관한 우려는 많았다. 영입 전까지 경기 경험을 쌓지 못했고, 체중이 지나치게 불었기 때문. 헤인즈의 부상 공백을 메우는 것은 물론, 코트에서 조금이라도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느냐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존슨의 가세는 곧 잭슨에게 기회였다. KBL 경험자이자 동네 선배였던 존슨이 잭슨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 한국프로농구의 특성과 현재 팀에서의 위치를 상세하게 알려줬다.
 

존슨이 잭슨을 잘 다독이면서, 잭슨의 퍼포먼스도 달라졌다. 주득점원으로 나서기 충분했다. 국내 선수 가드도 잘 수비하는 등 공수 모두 맹활약했다. 무엇보다, 지역방어를 조금씩 깨기 시작하면서, 잭슨이 자신의 범용성을 스스로 넓혔다.
 

잭슨과 존슨의 호흡도 좋았다. 존슨이 실질적인 운영에 관여해, 잭슨이 공격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 또한, 돌파에 능한 잭슨과 스트레칭 빅맨인 존슨이 어우러지면서, 오리온 외국 선수 조합이 더 어우러졌다. 그 결과, 오리온은 결속력을 더 다질 수 있었다. 기존 전력을 좀 더 가다듬을 수 있었다.
 

헤인즈의 복귀가 오리온에 고민을 안겼다. 존슨이 운영과 다른 면에 보탬이 될 수 있고, 잭슨이 공격을 이끌 수 있기 때문. 오히려 국내 선수와 시너지 효과를 내려면, 잭슨이 나은 면도 있었다. 프런트 코트에서 뛸 국내 선수가 즐비했으나, 확실한 가드가 부족했기 때문.그래서 오리온은 존슨을 택할 수도 있었다.
 

이때 부산 KT(현 수원 KT)가 외국 선수 교체를 신청했다. KT는 존슨을 영입하고자 했고, 존슨은 KBL의 승인으로 KT에 새둥지를 틀었다. 이로 인해, 오리온은 헤인즈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잭슨은 헤인즈와 함께 뛰어야 했다. 비록 존슨과 함께 할 때만큼의 안정감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잭슨의 퍼포먼스는 이전보다 나아져 있었다. 이미 자리를 잡았기에, 주눅 들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헤인즈가 들어오면서, 오리온의 공격이 다변화됐다. 공격을 다변화한 오리온은 우승 후보로서 위용을 점점 보여줬다.
 

3위로 정규리그를 마친 오리온은 6강 플레이오프에서 원주 동부(현 원주 DB)를 만났다. 잭슨은 허웅(부산 KCC)과 두경민을 압도했다. 오리온은 잭슨의 활약에 힘입어 3경기 만에 4강 플레이오프로 올랐다.
 

4강 플레이오프에 오른 오리온은 직전 시즌까지 3연패를 했던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와 만났다. 잭슨이 양동근(현 울산 현대모비스 코치)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다. 오리온이 1차전을 따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잭슨은 2차전에서 맹공을 퍼부었다. 25점 5리바운드 6어시스트로 팀을 한 번 더 승리로 이끌었다.
 

적지에서 열린 첫 두 경기를 따낸 오리온은 시리즈 종결에 성큼 다가섰다. 잭슨은 비록 안방에서 열린 3차전에서 득점을 해내지 못했지만, 패스로 경기를 풀었다. 상대 수비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유려한 드리블 돌파로 상대 수비를 모은 후, 패스로 동료들의 득점을 도왔다. 이날 9어시스트로 승리의 수훈갑이 됐다. 잭슨이 맹활약했기에, 오리온은 4강 플레이오프 역시 단 3경기 만에 끝냈다.
 

모비스를 제친 오리온은 결승에서 안드레 에밋의 전주 KCC(현 부산 KCC)와 조우했다. 잭슨은 전태풍을 상대해야 했다. 오리온이 1차전을 내줬으나, 2차전을 따냈다. 그리고 잭슨이 3차전 때 살아났다. 3차전에서 20점 7리바운드 7어시스트로 맹활약했다.
 

잭슨의 활약은 4차전에도 이어졌다. 비록 전반에 단 2점에 그쳤으나, 후반에 20점을 몰아쳤다. 팀의 상승세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4차전에서 22점 8어시스트 5리바운드로 활약했으며, 자신을 수비했던 전태풍과 신명호(현 부산 KCC 코치)에게 ‘5반칙 퇴장’을 안겼다.
 

오리온은 그렇게 시리즈 첫 4경기에서 3승을 챙겼다. 우승에 단 1승만 남겨뒀다. 잭슨은 5차전에서도 32점 6리바운드 5어시스트로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나 오리온이 석패하면서, 잭슨의 퍼포먼스는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오리온은 6차전에서 시즌을 끝냈다. 잭슨은 26점 10어시스트로 시즌 종결에 이바지했다. 그 결과, 오리온은 2001~2002시즌 이후 처음으로 우승했다. 고양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에는 처음으로 우승했다.
 

오리온은 우승 후 두 명의 외국 선수와 함께 하고자 했다. 헤인즈는 재계약을 했지만, 잭슨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오리온과 재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잭슨은 5년 간 KBL로 들어올 수 없었다.

한국을 떠난 이후
KBL을 떠난 잭슨은 중국 2부리그(NBL)로 향했다. 이후 이스라엘로 향하기도 했다. 이윽고 그리고 2017년 여름에는 NBA에 다시 노크했다. 그러나 NBA 진출은 고사하고, 서머리그에서의 경쟁력도 크지 않았다. 서머리그에서도 평균 8.9분 동안, 1점 2어시스트 1.3스틸에 머물렀다. 

 

그 후에는 선수로 뛰지 못했다. 불미스러운 일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 체포된 후 보석으로 풀려났고, 이후 농구 선수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렇지만 여의치 않았다. 잭슨의 짧았던 전성기는 아쉽게 마무리됐다.

 

사진 제공 = 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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