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잊혀진 인물들 - ‘육각 슈터’ 조우현

BAKO INSIDE / 김영훈 기자 / 2019-11-05 19:30:35

[바스켓코리아 = 김영훈 기자] 우여곡절(迂餘曲折). 조우현의 농구 인생을 대변하는 사자성어이다.


촉망받던 유망주에서 화려했던 프로 생활. 잠깐의 부침과 우승 반지 그리고 홧김에 결정한 은퇴. 그리고 아마추어 지도자에서 농구 레슨 강사까지.


육각 슈터의 인생은 이렇게 파란만장했다. 바스켓코리아는 조우현을 만나 그의 농구 인생을 되짚어봤다.


※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9월호 웹진에 게재된 글을 수정/각색했습니다.


[아마추어 시절]
본격적으로 조우현이라는 이름을 알린 것이 동아고 시절로 알고 있다.
고등학교 때는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몰랐다. 전국대회 나가서 우승을 하기는 했으나 출전한 팀들이 약한 대회였다. 그게 감독님의 전략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당시를 떠올리면 같이 뛰었던 멤버로 구병두, 강대협, 주희정 등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멤버가 괜찮았던 거 같다(웃음).


고등학교를 마친 뒤인 1995년에 청소년대표에 선발됐다.
여러 기억이 많지만, 농구 인생 중에 가장 좋은 기억을 꼽으라면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동기들과 너무 즐겁게 지냈다.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했지만 재밌었다. 김성철, 조상현, 황성인, 장영재, 정훈종, 이규섭, 임재현 등 동기, 후배들과 같이 있었는데 너무 즐거웠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수능 끝나고 바로 대학교에 합류했다. 중앙대에 들어간 지 두 달 있다가 청소년대표팀에 들어갔다. 감옥에서 탈출한 기분이었다. 대학교는 규율이 엄했고, 낯선 환경이었다. 훈련도 엄청 힘들었다. 군기가 바짝 들어있다가 동기들과 만나니 기분이 좋았다.


대회를 나가서의 기억은 어땠나?
필리핀 대회였다. 우리 팀 손발이 너무 잘 맞았다. 어린 선수들이지만 실업팀과 연습경기를 하면 항상 우위에 있었다. 대회에서도 편하게 결승을 갔다. 마지막에 중국을 만났는데 키가 너무 크더라. 그런 선수들을 만나 이겨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조직력으로 풀어나갔다.


개인상도 휩쓸었다.
MVP와 BEST5에 뽑혔고, 3점슛 상도 받았다. 우승 후 선수들이 모두 나에게 달려왔다. 가장 밑에 깔려서 죽을 뻔했다. 추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억만 난다.


중앙대에서의 기억을 되짚어달라.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졸업한 상태였다. 1학년 때부터 경기를 뛸 정도로 멤버가 많이 약했다. 조우현 개인으로 봤을 때는 성장했지만 학교는 힘든 시기였다. 팀 성적도 아주 좋지 않았다.


4학년 때 김주성, 송영진 등이 중앙대에 입학했다.
중앙대의 전성기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4학년 때부터 우승을 하기 시작했다. 멤버가 많이 좋아졌다. 그 때가 시작점이었다. 경기를 하면 편했다. 슈터로서 슛 던지기가 편했다. 주성이와 2대2 플레이도 재밌었다. 슈터임에도 어시스트가 많았던 기억이 있다.


[프로 시절]
데뷔 시즌을 대구 동양(현 고양 오리온)에서 보냈다.
엉망이었다. 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나쁘지는 않았다. 평균 득점을 10점을 넘겼었다. 힘들었던 기억이었던 것은 맞다.


두 번째 시즌을 앞두고 창원 LG로 트레이드됐다. 본격적으로 조우현을 알린 시기로 기억한다.
LG에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보여줘야겠다’라는 생각이 강했다. 앞만 보고 달렸다.


당시 LG는 공격 농구로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순서를 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LG에서의 6년은 재밌고 신이 난 시간이었다. 특히 창원 팬들은 너무나 열광적이었다. 가수가 무대에 올라가서 함성을 받으면 전율이 오는 것을 나도 느꼈다. 창원에서는 항상 힘이 났다.


첫해, 두 번째 해는 주전이었으나 신장이 큰 선수들이 오면서 식스맨으로 밀렸다. 그래서 포지션 변경을 결정했다. 내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던 중 감독님의 권유로 인해 포인트가드로 전향했다.


‘육각 슈터’라는 별명도 그 때 생긴 거 같다.
누구한테 감사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얼굴 덕분에 아직도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감사하다. 뒤에 ‘슈터’라는 명칭이 붙은 것도 너무 좋았다.


전자랜드를 거쳐 KCC로 향한 뒤 우승 반지도 꼈다.
허재 감독님을 비롯해 추승균, (강)병현이 (하)승진이, (임)재현이 등 선수 모두에게 고맙다. 내가 언제 우승반지를 껴보겠나. 주인공이던 주인공이 아니던 중요하지 않았다. 팀 소속으로 현장에만 있어도 기뻤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물론 만감이 교차했다. 6강, 4강 플레이오프까지는 알토란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챔프전에서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뛰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한 시즌을 더 뛰고 은퇴를 결정했다.
많이 아쉬웠다. 경험 부족에서 오는 불찰이었다. 내 나이가 35이었다. 뛸 수 있는 체력도 있었고 몸도 만들고 있었다. 은퇴 아니면 2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구단 생각이 그렇다면 2군을 가거나 트레이드 요청을 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은퇴 이후]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했다.

2010년에 제물포고 A코치를 6개월 동안 했다. 이후 천안 성성중학교로 갔다. 이후 낙생고에서 3년 정도 있다가 성남중학교로 향했다.


바로 중,고등학교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
화려하게 은퇴를 하고 외국 유학을 간 뒤 프로 구단 코치로 가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유학보다 현장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리고 지방에 있는 학생들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밑에서부터 단계별로 올라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후…
쉴 새 없이 달려온 그는 올해 겨울 지도자 생활을 끝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더 아래단계로 옮겼다. 현재 조우현은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일반인에게 농구를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숨은 고수라는 어플을 이용해 시작했다. 경기도, 서울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 깜짝 놀랬다. 일정이 너무 바빠 수업을 줄일 정도이다. 야외에서만 1대1로 진행한다. 5대5, 3대3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닌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6개월 정도 레슨 강사 일을 경험했지만 많은 것을 느낀 듯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느낀 것을 쉬지 않고 전했다.


“현재 농구 인기가 별로이지 않냐. 하지만 바깥은 다르더라. 야외코트에는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그들의 열정을 더 이끌어낼 사람이 필요하다. 내가 밖으로 나가보니 레슨을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다. 여자 초등학생부터 성인 남자까지 층들이 다양하다. 동호회에서 농구를 즐기고 더 실력을 키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스킬트레이닝은 어느 정도 실력이 되어야 하니 힘들다. 조금 더 눈높이를 낮춰서 할 필요가 있다.


나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도 수강생이 너무 많아서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뛰어다닌다. 농구 인기를 살리려면 탁상공론만 벌일 것이 아니라 현장에 나가야 한다. 밖에는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런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


이렇듯 조우현은 농구의 가장 아래 단계에 있지만, 농구에 대한 애정만큼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 더 많은 기사를 보고 싶으시다면? ☞ 바스켓코리아 9월호 웹진 보기


사진 제공 = 김우석 기자, KBL


[ⓒ 바스켓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영훈 기자 김영훈 기자

기자의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