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KBL 초대 외국 선수 MVP의 주인공, 제이슨 윌리포드
- BAKO INSIDE / 김영훈 기자 / 2021-02-08 14:35:49

본 기사는 WKBL 3라운드가 끝난 시점인 12월 말에 작성되어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1월호에 게재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버지니아 대학의 농구 팀인 버지니아 캐벌리어스는 메이저 컨퍼런스인 ACC(아틀란틱 코스트 컨퍼런스)에 속해 있다. 버지니아는 과거 70년대부터 NCAA에서 손꼽히는 명문 팀이다.
버지니아는 또한 KBL도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버지니아 대학교 출신의 선수들 중 KBL 외국 선수로 활약한 인물들이 있다. 크리스 윌리엄스와 주니어 버로가 그 주인공. 모두 KBL에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던 선수들이다.
이보다 앞서 버지니아 출신으로 KBL 성공 스토리를 써내렸던 외인이 있다. 원주의 상징적인 인물인 제이슨 윌리포드이다. 나래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윌리포드의 이야기를 다뤄보았다.
윌리포드, 낯선 한국에서 첫 시즌을 보내다
한국에 프로농구가 처음 출범한 1997년. KBL은 외국 선수 제도 도입을 결정했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 선수는 프로축구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농구보다 15년이나 일찍 시작한 프로야구에서도 외국 선수 제도는 없었다(야구는 1998년부터 시행).
1997년 처음으로 열린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 제이슨 윌리포드는 전체 14순위로 원주 나래 블루버드에 선발되었다.
윌리포드는 한국에 오기 전까지 커리어가 매우 화려한 선수였다. 특히, 대학 시절 버지니아 대학 소속이던 그는 4년 동안 3번이나 팀을 NCAA 토너먼트에 이끌었다.
2학년 시절 팀을 16강(스위트 식스틴)으로 일조했던 그는 4학년 때 8강(엘리트 에잇)까지 견인했다. 버지니아 대학이 8강에 오른 것은 12년 만에 일. 당시 윌리포드는 팀의 주장이었고, 팀에는 후에 SBS에 뛰던 주니어 버로가 속해 있었다.
대학에서 성공을 거둔 윌리포드가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 곳은 유럽에서 가장 추운 나라인 아이슬란드. 유럽 서북쪽에 위치한 곳에서 윌리포드는 외국 선수 MVP를 수상했다. 이후 그는 동양의 낯선 나라인 한국으로 이동했다.
당시 윌리포드를 선발한 나래에는 ‘사랑의 3점슈터’ 정인교를 제외하면 유명한 국내 선수가 없었다. 칼레이 해리스와 윌리포드 또한 주목 받는 외국 선수는 아니었다. 때문에 나래는 시즌 전 최하위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첫 경기, 나래는 해리스가 49점을 퍼부었다. 윌리포드도 22점 15리바운드를 올리며 임팩트 있는 데뷔전을 펼쳤다. 나래는 패했지만, 모두를 놀라게 하기 충분한 경기였다. 그리고 이는 돌풍의 서막이었다.
첫 경기 패배 이후 나래는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4연승을 달렸고, 한 경기 패한 뒤 다시 6연승을 질주했다. 11경기에서 10승을 챙긴 것. 나래는 단숨에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나래의 이변에 중심에는 윌리포드가 있었다. 그는 골밑이면 골밑, 3점이면 3점 등 다양한 방법으로 득점을 해냈다. 수비도 좋았다. 194cm의 신장은 KBL에서 페인트존 수비를 하기 충분했다. 특히 수비 센스가 돋보였다. 블록슛도 좋았고, 스틸도 준수함 이상이었다.
공수가 완벽했던 윌리포드는 정규리그에서 27.9점 12.8리바운드 3.6스틸 1.4블록을 기록했다. 득점은 4위, 스틸은 2위, 리바운드와 블록슛은 1위였다. 윌리포드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존재감을 발휘했다.
여기에 32.3점으로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한 해리스와 19.8점을 올린 정인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목 받지 못하던 강병수, 장윤섭, 이인규 등도 힘을 보탰다. 이들의 활약이 합쳐진 나래는 13승 8패를 기록, 정규리그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반전의 주인공인 나래는 6강 플레이오프에서 인천 대우 제우스를 만났다. 우지원이 포지했던 대우에게 1승 2패 열세에 놓이기도 했지만, 나래는 3연승을 달리며 4승 2패로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어 안양 SBS 스타즈도 4승 1패로 꺾으며 챔프전에 진출했다.
초대 챔피언 자리를 놓고 만난 팀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강동희, 허재, 김영만, 김유택 등 당대를 호령했던 스타들이 모인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이변을 노렸던 나래는 윌리포드와 해리스를 앞세워 맹렬하게 싸웠다. 하지만 기아를 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승 4패로 우승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윌리포드는 플레이오프 평균 26.5점 11.8리바운드 3.4스틸 2.1블록을 기록하며 날아다녔다. 하지만 마지막에 힘이 부족해 우승에는 실패했다. 윌리포드로서는 정규리그 초대 외국 선수 MVP를 수상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우승 도전’ 윌리포드, 6강 벽을 넘지 못하다
나래는 당연히 윌리포드와 재계약을 맺었다. 득점 1위를 기록했던 해리스는 한국을 떠났다. 대신 윌리엄 헤이즈가 영입됐다. 헤이즈는 해리스에 비해 득점 능력이 떨어졌다. 자연스레 윌리포드의 공격 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윌리포드에게 상대의 집중 견제가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그는 거친 수비 속에 평정심을 잃는 모습도 있었지만, 꿋꿋이 자신의 활약을 펼쳐보였다. 1997-1998 시즌 43경기에 나선 윌리포드는 평균 27.9점 11.7리바운드 3.2어시스트 2.6스틸 1.3블록을 남겼다. 여전히 다재다능한 모습이었다.
해리스가 빠졌음에도 윌리포드가 중심을 잡아준 나래는 26승 19패를 기록하며 정규리그 4위에 올랐다.
다시 한 번 우승에 도전하는 나래는 6강 플레이오프에서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상대했다. 기선제압을 해야 하는 1차전. 중요한 승부였지만, 윌리포드는 코트에 없었다. 정규리그 막판 정재근과 몸싸움을 벌여 2경기 출장 정지를 받았기 때문.
윌리포드가 없었던 나래는 첫 경기에서 정인교가 37점을 넣었음에도 패하고 말았다. 두 번째 경기에서 절치부심하고 돌아온 윌리포드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무려 47점을 몰아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래는 윌리포드의 원맨쇼 덕분에 균형을 맞췄다.
이후 3차전은 동양이, 4차전은 나래가 가져갔다. 4강 티켓을 놓고 벌인 운명의 5차전. 윌리포드는 야투 16개 중 6개밖에 넣지 못하며 19점에 그쳤다. 평소의 윌리포드를 생각했을 때 아쉬운 활약이었다.
반면, 동양에서는 키이스 그레이가 홀로 42점을 올리는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다. 김병철도 15점을 보탰다. 이로 인해 나래는 5차전에서 패했고, 윌리포드의 두 번째 시즌을 6강에서 마무리했다.

윌리포드, 나래에서 기아로 향하다
윌리포드는 세 번째 시즌에도 나래와 손을 잡으며 한 번 더 원주에서 시즌을 보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시즌을 앞두고 윌리포드는 나래가 아닌 기아 유니폼을 입게 됐다. 데릭 존슨과 트레이드 된 것.
강동희-정인교-김영만-클리프 리드-윌리포드까지. 기아는 호화 라인업을 구축하게 됐다. 기대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1998-1999시즌 31승 14패로 대전 현대 다이넷에 이은 정규리그 2위에 올랐다.
윌리포드는 리드가 있는 탓에 수치는 이전 시즌들에 비해 떨어졌다. 42경기 평균 21.3점 11.8리바운드 2.3스틸을 올렸다.
대망의 플레이오프. 기아는 4강에서 문경은이 있던 수원 삼성을 만났다. 삼성도 저력이 있다고 평가받았으나, 기아의 상대가 되기는 어려웠다. 기아는 3승 1패로 손쉽게 삼성을 제압하며 챔프전에 올랐다. 윌리포드는 이 시리즈에서 20.3점 12.3리바운드 3.4어시스트를 올리며 챔프전 진출에 일조했다.
윌리포드는 프로 원년 이후 다시 한 번 우승에 도전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나래의 우승을 막았던 기아의 유니폼을 입고 정상을 노리게 됐다.
하지만 윌리포드의 몸상태에 문제가 있었다. 플레이오프 때 무릎 부상을 당한 것이 원인이었다. 때문에 윌리포드는 챔피언 결정전 내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이었다. 윌리포드는 경기당 평균 17.6점 8.4리바운드라는 2%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다.
리드가 이를 메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반대로 현대에는 조니 맥도웰과 재키 존스가 맹활약을 펼쳤다. 시리즈 전적 4승 1패. KBL 1998-1999시즌 우승은 현대에게 돌아갔다. 윌리포드는 우승에 도전했지만, 이번에도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윌리포드, 그 이후...
놀랍게도 1999년 챔프전 5차전은 윌리포드의 현역 마지막 경기였다.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대신 지도자 생활을 통해 농구와의 연을 이어갔다.
윌리포드가 처음 지휘봉을 잡은 곳은 존 마샬 고등학교. 그는 이후 아메리칸 대학에서 4년, 보스턴 대학에서 5년 동안 코치로 재임했다. 마침내 윌리포드는 2009년 토니 베넷 감독과 함께 모교인 버지니아 대학의 코치로 부임했다.
버지니아로 돌아온 윌리포드는 2017년 수석 코치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2019년 버지니아 대학교의 NCAA 토너먼트 우승에 일조했다. 그동안 명문으로 자리매김했던 버지니아 대학이지만, 3월의 광란 우승은 이때가 처음이었다(당시 우승 주역 중 한 명이 애틀란타 호크스의 디안드레 헌터이다).
이렇듯 엄청난 실력으로 한국을 평정했던 윌리포드는 현재 고국에서 성공한 지도자의 삶을 살고 있다.

사진 제공 = KBL
바스켓코리아 / 김영훈 기자 kim95yh@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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