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바코 인사이드] 추억의 외인(外人) - ‘현대 왕조를 이끈 사나이’ 조니 맥도웰

기사승인 2019.10.07  22:33:56

공유
default_news_ad2

[바스켓코리아 = 김영훈 기자] 처음 뽑혔을 때는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심의 눈초리는 시즌이 시작한 뒤 바로 없어졌다. 기어이 그는 KBL 정상에까지 도달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스토리. 조니 맥도웰의 이야기다. 팀 동료도 믿지 못했던 그가 KBL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기까지. <바스켓코리아>는 맥도웰의 이야기를 되짚어보았다. 

※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8월호 웹진에 게재된 글입니다. 

맥도웰, 그 시작에 관하여 

1997년 여름에 열린 KBL 외국인 드래프트. 19번째 순서. 대전 현대 걸리버스는 조니 맥도웰을 지명했다. 이 때만 해도 그가 KBL의 역사를 바꿀 인물이라는 것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0cm가 안 되는 작은 키에 땅땅한 체구. 맥도웰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당연히 팀 내에서도 그에 대한 의문 부호가 붙었다. 
 
추승균 전 KCC 감독은 “원래는 뽑힐 선수가 아니었다. 다른 외국인선수들이 ‘맥도웰이 누구냐’고 그랬다. 완전 무명이었다. 처음에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갔다. 맥도웰 농구를 보고 선수들끼리 우리 팀 큰일 났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맥도웰에 대한 의심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열린 시범경기. 맥도웰은 11점을 올리며 순조롭게 한국 팬들에게 첫 선을 보였다. 뒤이어 펼쳐진 경기에서도 23점, 30점을 폭발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맥도웰,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다
시범경기에서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이자 스포트라이트는 2순위 제이 웹보다 19순위 맥도웰에게 쏠렸다. 
 
정규시즌 첫 2경기 평균 34점 15리바운드. 맥도웰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열풍은 끝나지 않았다. 7번째 경기에서는 광주 나산을 상대로 50점을 퍼부었다. 시즌 막판에도 서울 SK에게 49점을 선사했다. 
 
최종 기록은 27.2점 11.8리바운드. 득점은 5위, 리바운드는 4위였다. 44경기 모두 두 자릿수 득점. 팀도 31승 14패. 현대가 1위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했다.
 
맥도웰, 현대 왕조를 이끌다
봄 농구에서도 맥도웰과 현대의 위력은 여전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대구 동양(현 고양 오리온)을 3전 전승, 완벽히 제압했다. 맥도웰과 제이 웹이 골밑을 지배했고, 외곽에는 이상민과 추승균이 버티고 있었다. 
 
상대 팀에서 분전했던 김병철 오리온 코치는 맥도웰을 어떻게 기억할까. “힘도 좋고, 골밑에서 득점과 리바운드가 너무 좋았던 선수였다. 경기 중에 상대를 위축시켰다. 특히 승부처에서는 더 강했다. 무서웠다”며 김 코치는 당시를 떠올렸다. 
 
기분 좋게 챔프전에 올라간 현대를 기다리고 있는 상대는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현 울산 현대모비스). 농구대통령 허재가 버티고 있었다. 초반 1,2차전은 현대의 패배. 허재가 손등 부상에도 진통제를 먹고 맹활약을 펼쳤었다. 
 

초반 2경기를 내리 패하자 대다수 사람들은 ‘단기전의 명수’ 기아의 우승을 예측했다. 그러나 3차전, 현대의 반격이 시작됐다. 4쿼터에만 10점을 올린 맥도웰(34점 11리바운드)을 앞세워 첫 승을 신고하더니 4차전도 가져갔다.
 
하지만 기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5차전을 잡고 우승까지 1승만 남겨놓은 것. 벼랑 끝에 몰린 순간 맥도웰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 기아 골밑에 폭격을 가하면서 30점을 몰아쳤다. 리바운드도 13개를 걷어냈다. 기세가 오른 현대는 7차전 마저 승리하며 프로농구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맥도웰은 그렇게 한국에 온지 반년 만에 팀을 정상의 자리로 올려놓았다. 
 
맥도웰과 영혼의 콤비를 자랑한 이상민 현 서울 삼성 감독은 “웹한테 가려졌다가 점차 1옵션으로 넘어왔다. 영리하고 알아서 움직이는 선수였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추승균 감독도 “초반에는 개인 플레이가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 없어졌다. 패스도 잘했고, 우리와 잘 맞았다”고 회상했다. 

이후 이.조.추 트리오와 맥도웰은 한국 농구를 지배했다. 1998-1999시즌 통합 우승. 1999-2000 시즌 정규리그 1위, 플레이오프 준우승. 3시즌 동안 KBL은 그야말로 현대 천하였다. 

맥도웰도 세월의 무상함을 견딜 수 없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현대 왕조는 2000-2001 시즌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정규리그에서 6위로 내려앉자 신선우 감독은 맥도웰과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용단을 내렸다. 
 
현대의 아이콘 같았던 맥도웰은 인천 SK 빅스로 팀을 옮긴다. 내리막을 걸을 것 같았던 맥도웰은 문경은과 함께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시즌 평균 22.0점 12.0리바운드. 팀도 4위로 이끌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는 송영진의 미친 활약에 밀려 6강에 만족해야 했다. 
 
문경은 SK 감독은 이 때를 떠올리며 “우리 모두 부활을 했던 시기였다. 믿음이 많이 갔다. 눈빛이나 몸짓만 봐도 서로 알았다. 이래서 맥도웰, 맥도웰 하는구나 싶었다. 시즌 중반까지 1위를 했다. 외국인선수가 한 명 빠지면서 6강에 멈췄지만 운이 따랐으면 우승도 했을 거 같다”고 말했다. 
 
맥도웰은 인천 SK와 한 시즌을 더 함께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말은 좋지 못했다. 마르커스 힉스, 리온 트리밍햄에 밀려 큰 힘을 쓰지 못했다. 팀도 7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맥도웰은 울산 모비스에서 한 시즌을 보낸 뒤 정든 한국과 작별을 고했다.
 
맥도웰, 外傳(외전)
7,077득점 3,829리바운드. 맥도웰이 7시즌 동안 남긴 기록이다.  
 
맥도웰에 대한 칭찬은 코트 내에서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생활면에서도 반듯해 여러 국내선수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상민 감독은 “처음에는 조용했는데 점점 친해졌다. 숭르 먹거나 문제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맥도웰과 특히 친했다는 조성원 명지대 감독도 “화끈했다. 대개 외국인선수들이 돈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맥도웰은 달랐다. 서글서글했고, 착실했다”고 덧붙였다. 
 
과연 그렇다면 맥도웰이 지금의 시대에 오면 어떨까. 추 전 감독의 대답은 단호했다. “지금은 와도 예전처럼 안 된다. 외국인선수들의 기술이나 신장이 많이 좋아졌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에 들어가서도 힉스 같은 선수들에게 많이 밀리지 않았냐. 90년대여서 맥도웰이 통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문경은 감독도 “신장제한이 있었으면 괜찮았을 거 같다. 다만 올해는 혼자 뛰니 신장이 작아서 힘들 것이다”고 말했다. 
 
반면, 이상민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좋은 가드가 있는 팀이면 무조건 데려올 만하다. 키는 작아도 농구를 영리하게 하는 선수라 괜찮을 것이다. 힘도 좋아서 충분히 통할 것이다. 다만 좋은 가드가 있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야 한다”며 다른 견해를 내놨다. 
 
스포츠에 만약이라는 것은 의미 없다. 하지만 농구의 인기가 급락한 지금, 맥도웰이라는 아이콘이 필요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과연 맥도웰이 현시대에 온다면 어떨까. 곰곰이 생각해보기에 좋은 주제이다. 

※ 더 많은 기사를 보고 싶으시다면? ☞ 바스켓코리아 8월호 웹진 보기

사진 제공 = KBL


김영훈 kim95yh@basketkorea.com

<저작권자 © 바스켓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